서울을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서울에서 프랑크푸르트로 떠나던 그때는 바야흐로 내 나이 여덟 살 때다.
대략 30년 전인 이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마치 열 장도 채 되지 않는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전체적인 맥락보다는 몇 개의 진하게 남은 장면들의 퍼즐을 가지고 나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려 보고자 한다.
국민학교에 갓 입학한 내 나이 여덟 살 당시, 기억나는 몇 개의 장면들이 있다.
차를 타고 다니며 한글로 쓰인 간판 읽기에 재미를 붙여 늘 자동차 창문에 얼굴을 딱 붙이고 다녔던 내 모습,
국민학교 입학식 날 누군가가 걸치고 있었던 새빨간 털 목도리,
그리고 수백 명의 아이들이 흐트러짐 없이 줄을 서 있게 하는 학교라는 이름의 처음으로 느꼈던 그 거대한 공기,
그리고 처음으로 그 무거운 질서 안에 나를 올곧게 세워 넣었을 때 스멀스멀 내 안에서 올라왔던 내 자신을 향한 대견함과 큰 무리 안에 한 일부가 되었다는 왠지 모를 안정감,
왼손잡이어서 선생님에게 자주 지적받던 나의 첫 짝꿍의 동그랗던 안경과 그가 빌려주었던 잠자리표 지우개,
그리고 한글로 그 어려운 글자 '월'을 잘 써서 나를 칭찬해 주던 담임 선생님의 긴 코트, 등의 장면들이다.
참 신기하게도 사람들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아도 그들이 품었던 모양과 색, 혹은 그들의 감정이 환하게 드러났던 다양한 표정들이 기억이 난다. 동시에 거울에 비친 나의 여덟 살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늘 무표정으로 주변을 예민하게 바라보던 나의 마음들 또한 기억이 나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서울을 떠나게 된 이유는 아버지의 회사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다니던 회사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지사장으로 가게 되었고 당시에 부모님이 그 사실에 무척 자랑스러워하셨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아마 나는 그때에도 무표정으로 그 분위기를 예민하게 느끼며 살피고 있었던 것 같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이 내가 곧 독일로 떠난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친구들이 나를 무척 신기하고 대단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약간 우쭐해지는 기분에 흘러나오는 미소를 억지로 참았던 기억도 난다.
1990년 초였던 당시 유럽이라는 곳은 심적으로나 거리로나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이 먼 곳이었기 때문에 어린 나는 몰랐지만 부모님, 특별히 엄마에게는 쉽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내가 아이 둘의 엄마가 되어 미국 이주를 준비하게 되면서 돌아보니, 그 당시 독일로 떠났던 우리 엄마의 나이는 지금의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나이었다. 인터넷조차 없던 그 시절에 독일이라는 나라는 지금의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멀고도 먼 미지의 나라였을 것이다.
'그 당시에 독일로 향했던 엄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미국 이주를 준비하며,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30년 전의 젊었던 나의 엄마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에게 미국 이주를 결정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나의 부모님이었다. 아직은 부모님 두 분 모두가 건재하시지만, 기약 없는 우리의 떠남과 너무나 멀어진 거리는 예기치 못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증폭시켰고, 그 불안함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나는 자신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나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이런 생각의 끝에 어느 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독일로 떠날 때 어땠어? 그때는 인터넷도 없었고 영상 통화도 안 되었는데, 어떻게 엄마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떠날 수 있었어? 힘들지 않았어?"
"힘들었지. 너무 힘들었지. 무엇보다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한 정보도 지금처럼 쉽게 얻을 수 없었고, 미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어린 너희들을 데리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갔던 거니까, 정말 두려웠지. 그래도 엄마는 이모들이 셋이나 있으니까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떠나는 건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던 것 같아."
그리고 그때의 그 젊은 엄마는 그 시간들을 너무나 잘 감당하고 4년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그 모든 지난 시간들을 그저 '감당했다'라는 평범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나도 그녀처럼 씩씩하게 그 불확실함을 살아낼 수 있을지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엄마, 나는 엄마와 아빠를 떠나는 것 그 하나, 그 하나 때문에 너무 힘들고 두려워."
"혜정아, 두려워하지 마. 엄마와 아빠는 괜찮아. 그리고 무엇보다 너는 믿음이 있잖아. 엄마는 그때 교회만 다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제대로 된 신앙이 없었어. 너는 그때의 엄마와 달리 굳건한 신앙이 있잖아, 걱정하지 마. 뭐가 두렵니."
확실한 해답에 말문이 막혔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두렵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선 어린 두 아이와 아이들의 짐까지 모두 지고 서 있는 젊은 엄마를 떠올린다. 어린 나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던 그녀의 날 선 두려움을 다시 들여다보며 전혀 몰랐던 젊은 엄마의 지난 무게를 이제는 그녀보다 다섯 살 많은 딸이 그대로 이어 받는다.
'나도 그때의 엄마처럼, 내 딸은 전혀 모르게, 그렇게 씩씩하게 나도 잘 감당해 볼게요.' 라며.
당시에 아버지는 홀로 먼저 독일로 떠나 집을 구하고 여러 가지 여건들을 미리 준비했고, 엄마는 나머지 한국의 짐과 일들을 정리하며 몇 주 뒤에 나와 내 동생을 데리고 독일로 함께 출국했다.
아버지는 먼저 독일로 떠나기 전에 나를 붙잡고 이야기했다.
"혜정아, 너무 걱정하지 마. 독일에 가면 정말 좋을 거야. 아빠가 먼저 독일에 가서 우리 가족이 살 멋진 집을 구해놓을게. 너가 좋아하는 만화에 나오는 궁전처럼 크고 멋진 집일 거야. 독일에는 정말 멋진 집들이 많이 있거든!"
그때 아버지가 보여준 사진이 정확히 그 사진이었는지, 혹은 내가 이후에 그 사진을 발견하고 혼자 생각을 했던 건지는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독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내내 한 사진을 붙잡고 바라보며 설레하며 왔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비행기 안에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가 독일에 가면 이런 궁전 같은 집에서 산다고 그랬어! 엄마도 알아? 정말 우리 집도 이렇게 생겼을까?"
나중에 커서 알게 되었지만 그 사진은 뮌헨에 있는 그 유명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이었다.
긴 비행을 마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했던 집의 문을 여는 순간, 여덟 살 아이의 와르르 무너진 마음은 다 표현하지 않아도 느껴질 것이다. 그것은 그 어떤 어마어마한 저택이었더라도 실망할 수밖에 없는 말도 안 되는 꿈이었고 환상이었다.
동화에 나올 법한 성을 보여주며 예민한 딸의 마음에 반짝거리는 상상들을 가득 채워 걱정을 잠재운 아빠도, 그것을 굳게 믿고 몇 날 며칠을 오로지 독일의 성만을 상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떠나왔던 여덟 살의 나도, 우리에겐 그것이 우리 나름의 떠남을 맞이하는 각자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돌아보면 언제나 아빠는 나에게 그런 아빠였고, 나는 아빠에게 그런 아이였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겪었던 나의 떠남의 계절은, 나의 손을 꼭 쥔 엄마와 나의 마음에 설렘을 안긴 아빠로 인해 무탈하게 지나갔다. 아무 어려움도 없었고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했던 여덟 살의 내가 잠든 시간에는 아마도 엄마와 아빠의 여러 이야기와 마음들이 밤을 새워 오고 갔을 것이다.
부모가 되어 떠남을 준비하는 지금에서야 나는 그것을 깨닫는다. 지난날 부모가 나의 뒤에서 온몸으로 막고 서 있던 그 모든 것들을 새롭게 직면하며,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그들의 지난 무게와 동시에 한없는 감사함을 느낀다.
정말이지 어린 날의 그 모든 것은 부모의 몫이었다.
-
어쩌다 보니 10년 이상을 한 나라에 머문 적 없는 사람입니다. 곧 미국으로의 이주를 앞두고 지난 과거에 떠나왔던 시간들을 다시 글로 복기하며 또다시 새로운 떠남을 준비합니다. 일상과 여행의 경계에서 배우고 느꼈던 마음을 담은 브런치 북 <나는 또 떠납니다>의 다음 편도 기대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