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에서 서울로
서울을 떠나 독일로 향한 뒤 4년이 흘렀다.
독일 초등학교인 그룬트 슐레(Grund Schule)에 입학해서 그 사이에 또 한 번 전학을 하고, 졸업 학년인 4학년이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주재원 임기인 4년을 채우고 가족 모두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4년 동안 나는 그곳에서 참 많은 변화의 시간을 지나왔다. 한국인이라고는 나뿐이었던 학교 환경 덕분에 현지인만큼의 독일어를 습득했고, 늘 얌전하고 소심했던 성격은 매일 남자아이들과 축구를 하는 등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
사람은 환경에 얼마나 잘 적응할 수 있는가.
그리고 사람은 환경으로 인해 얼마나 변화할 수 있는가.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했던 독일 학교에서의 첫 며칠을 기억해 본다.
처음 살았던 지역이 꽤나 외진 지역이었기 때문에 태어나 처음으로 까만 머리의 동양인을 본 학교 아이들은 나를 마치 외계인 보듯 대했다.
집으로 혼자 걸아가던 나를 보며 몇 무리의 짓궂은 남자아이들이 손가락으로 눈꼬리를 위로 올리며 “칭창총”이라며 중국인을 비하하는 소리를 내며 낄낄거렸던 그 하굣길의 장면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이 난다.
당시에 아빠는 그 소식을 듣고 화를 내며 학교로 달려갔고, 그 이후 한동안 엄마가 하굣길에 나를 데리러 왔던 기억이 난다.
"나는 왜 눈동자랑 머리카락이 검은색이야?"
아빠는 아직도 내가 했던 이 질문이 기억난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은 언제나 그랬듯 이를 꽉 물고 지냈던 나의 긴장을 서서히 누그러뜨렸고 나는 낯선 환경에 서서히 나만의 자리를 만들어갔다.
나의 초등학교 4년은 환경이 얼마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어렵지만 성공적인 실험과 같은 시간이었다.
아동기에서 4년이라는 시간은 한 아이의 성격과 언어가 바뀌는데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독일을 떠나오며 지금까지 나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언어도 사람도 아닌,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문화의 흔적이다.
독일은 초등학교가 4년 제이고 5학년부터는 직업학교와 일반 중고등학교(김나지움)로 나뉘어 진학을 한다. 독일어를 모두 잊어버린 지금 김나지움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고민도 없이 바로 나오다니 쓰면서도 놀랍다. 기억의 영역은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놀았던 기억이 대부분인 독일 학교에서의 시간 중 4학년 때의 교실 안 풍경을 떠올리면 다행히도 공부에 열중했던 몇 개의 장면이 남아있다.
나는 과목 중에 독일어를 가장 좋아했고 잘했다. 선생님이 채점한 시험지를 나누어주며 어떻게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독일에서 태어난 사람보다 독일어를 더 잘할 수 있냐며 나에게 칭찬을 해줬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칭찬을 받았던 기억은 참 오래간다. 과거가 비교적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나의 선택적인 기억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당시에 공부를 잘하거나 좋아하는 친구들이 중고등학교인 김나지움에 진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아이들이 김나지움에 진학하길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이 당시에 어린 나에게도 굉장히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한국과 같이 무조건 고등 교육을 받고 대학교로 진학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의무나 수순은 그곳에 없었다.
초등학교 졸업 전까지 모든 아이들은 주어진 공부를 의무적으로 열심히 해야 하지만, 졸업 후에는 공부 말고도 다른 선택지도 있으니 그 누구의 압력 없이 각자 자유롭게 선택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당시 어린 나이었지만 그러한 분위기가 그 어떠한 주고받는 스트레스 없이 참 자연스럽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라면 무조건 그리고 어떻게든 김나지움에 들어가야지, 그리고 당연히 (공부는 해야지가 아니라) 대학은 가야 하지 않을까’ 라며 속으로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독일에 살았지만 이미 뼛속까지 스며든 메이드 인 코리아의 대학지상주의와 주입식 인생은 그때에도 이렇게나 강력한 것이었다.
또 다른 색다른 기억 중 하나는, 저녁에 집으로 경찰이 들이닥친 일이다. 평소처럼 평범한 저녁 시간이었는데 알고 보니 아랫집 이웃이 위층에 사는 우리가 너무 시끄럽다며 경찰에 신고를 했던 것이다.
설명 후에 경찰을 돌려보냈지만 아무리 그래도 경찰까지 부를 일이었을까 생각하니 늘 친절하기만 했던 아랫집 사람들에게 섭섭한 마음이 드는 동시에 유난히 해외살이가 고되게 생각되었다고 엄마는 그날을 기억했다. 그리고 나아가 더 특이했던 것은, 그 이후에도 그 이웃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와 동일하게 우리를 대했다는 점이다.
지나고 보니 이 일은 독일 사람들의 주된 성격이 여실히 잘 드러났던 사건이었다. 내가 느낀 대다수의 독일 사람들은 모든 일에 악의 없이 개인의 합리를 추구하고 정보다는 법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는 경향이 있었다. 합리성보다는 개인의 심중을 따지고 정을 중시하는 한국 사람들과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먼 것이다.
위에 몇 가지의 경험들 외에도 지금 생각하면 낯설고 너무나 다른 문화를 접했던 시절이었다. 어른이 되어 독일이라는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다각도에서 지식적으로 알아가게 되면서 지난 시절 그 안에서 직접 부딪히고 느꼈던 나의 감정들을 떠올리면 참 재미있다.
당시에 느끼긴 했지만 미처 그것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을 어른이 된 이제야 깨닫게 되기도 하고, 그곳에서 내가 자연스럽게 접하고 살아갔던 문화들이 아직까지도 나도 모르게 나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될 때, 그것의 좋고 나쁘고의 문제를 떠나 그저 이 모든 경험들이 선사해 준 특별함에 한없이 감사함을 느낀다.
문화 차이라는 개념조차 없는 나이에 내재된 한국적 사고체계 외의 타문화를 자연스럽게 체득했던 지난 4년은 어쩌면 지금의 나의 유연성에 가장 큰 뿌리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이 사실을 성인이 된 지 아주 오래 뒤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다양한 문화 충격을 경험한 뒤에 마치 그것을 흡수할 수 있는 장치를 비로소 얻게 된 것처럼, 나는 그렇게 나만의 특별함을 장착하게 된 것이다.
어쩌다 보니 10년 이상을 한 나라에 머문 적 없는 사람입니다. 곧 미국으로의 이주를 앞두고 지난 과거에 떠나왔던 시간들을 다시 글로 복기하며 또다시 새로운 떠남을 준비합니다. 일상과 여행의 경계에서 배우고 느꼈던 마음을 담은 브런치 북 <나는 또 떠납니다>의 다음 편도 기대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