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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억중 May 01. 2021

장식에 대하여 (7)

공공의 선에 기여하려면


누정 안에서 바깥세상을 향해 관망할 경우, 단청으로 인해 주변 환경으로 이어지는 연쇄효과에 대해 그 감흥을 노래하는 대목도 살펴보았지만, 단청이 입혀진 건물을 멀리 떨어져 바라다보며 ‘이유 있는 장식’이 주변을 어떻게 변모시켜 공공의 선에 이바지하는지를 묘사한 대목도 주의 깊게 새겨볼 필요가 있다. 아름다운 환경이란 그저 산이 있고 물이 있어 우연히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자리, 그런 모습의 누각이 있고 단청이 있어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야 많은 이들의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특히나 저 공중을 향해 서서히 은밀하게 뿜어내는 단청 빛 가루들은 주변을 지나다 문득 그 세례를 받은 이의 감정을 일순간 고양시키는 형이상학적 장치에 다름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채수 선생의 지락헌만 해도 그렇다. 단청이 햇빛에 비쳐 물에서 내로, 내에서 골짜기에 이르기까지 그 효과가 점차 이웃으로 번져 주변 일대 환경을 이내 훤칠하게 바꾸어 놓았으니 모두가 그 기이한 풍경을 찬미하며 감상하지 않는 이가 없다하지 않는가.


아, 슬프외다. 땅은 고금이 없으나, 이치는 흥폐가 있으므로, 이 땅이 옛날에는 돌과 가시에 가려졌고, 여우와 토끼의 굴혈이 되어 우뚝 높은 것이 다만 산인 줄 알았을 따름이요, 잔잔히 흐르는 것은 다만 물인 줄 알았을 뿐이니, 어찌 그 아름다운 경치가 그 가운데에 간직되었을 줄을 알았겠는가.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솟은 누와 높은 각()이 산을 지고 물에 다달아 단청이 햇빛에 비치니, 내와 골짜기가 빛나매 지나가는 사람들이 바라보면, 마치 구슬 궁신선 절과 같아서 모두 찬미하고 감상하지 않는 자 없으니, 아,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간직하였던 것을 이제 그대에게 끼쳐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채수(蔡壽, 1449-1515), 지락헌기(至樂軒記)]


여기서 청, 적, 황, 흑, 백의 오방색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아 단청은 분명코 한기(寒氣)가 지배하는 공간에 온기(溫氣)를 불어넣어 주변 환경을 일거에 화사하게 바꾸어 놓는 수단이었을 것이며, 또한 그늘이 져 어둡고 칙칙한 공간을 밝고 환한 공간으로 전화시켜 분위기를 새롭게 반전시키는 힘을 발휘하였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게 멋진 배경이 만들어진 사이로 자연스레 부각된 단청 입힌 건물의 각별한 존재감은 또 어떠했을 지 그 고귀함을 헤아려 상상해볼만 하다. 게다가 단청의 다스한 기운으로 인해 그곳을 지나는 수많은 이들의 심정을 알게 모르게 어루만져주었을 위안(慰安)의 저력은 또 어떠했을까.


모스크바 크렘린 블라고베시첸스키 성당(성모 수태 고지 성당)


허긴 러시아 성 페테스부르그나 모스크바에서도 한기와 온기 사이의 공존과 대비를 절묘하게 이루어 놓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사진으로 본 그 도시들은 곳곳에 성당의 높은 뾰족탑 전체가 황금으로 칠해진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아름다운 외관에도 불구하고 나는 솔직히 러시아 정교회가 그리스도교 정신과 어긋나게 너무 사치스러운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었다. 얼마나 경사가 심한지 꼭대기 높은 곳까지 올라가 고공의 두려움을 이겨내며 작업을 해야만 했었을 불쌍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심지어는 국민 대다수가 빵 한 조각이 없어 살기가 어렵다하던데, 진짜 황금 칠이라면 저걸 팔아서라도 궁휼에 앞장서야 하는 게 교회의 본래 모습이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얼마나 섣부른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은 현지에 직접 가보고난 후였다. 그 때가 8월이었는데도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음울한 기운이 도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길을 지나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성당 황금색 첩탑이 눈에 들어 왔다. 놀랍게도 첨탑은 따뜻하고 안온한 빛을 사방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스산했던 내 마음도 첨탑을 보는 순간 이내 수그러들었다. 보면 볼수록 고귀하고 고마운 빛이었다. 첨탑의 높은 위치도 위치려니와 황금 칠이 아니었다면 반사되는 빛 속에 어떻게 온기를 담아낼 수 있었을까?


곳곳에 서 있는 첨탑들은 수많은 시민들에게 도시의 음산한 기운을 삭여주는 위대한 발광체로 우뚝 서 있으니, 이를 두고 어찌 사치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힘들고 어려운 이들의 위로자여야 할 교회가 저 빛으로 인해 교회다울 수 있으니, 명실 공히 세상의 빛으로 존재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순간 나는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나는 거기서 다시 한 번 한기와 온기가 상생하여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느끼게 하는 절묘한 조화를 뚜렷하게 목격하였다. 그 발광(發光)의 신비는 의외로 단청이나 금빛을 두른 첨탑에 있었으니, 정작 값비싼 것은 재료가 아니라, 자연 이치에 대한 이해와 응용의 지혜였던 것이다.


이처럼 단청이나 첨탑의 이유 있는 장식효과야말로 건물(대상)과 산천(배경) 사이, 절묘한 상생의 미학을 가능하게 했던 요인이었을 터이니, 이를 두고 ‘빛나는 장식’이라 일컬을만하지 않겠는가. 장식이 장식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일순간 주변 환경을 뒤바꿀 만큼 ‘빛나는 진화’에 기여하는 경지! 이쯤 되면 마티스 그림처럼 건축 또한 그 어느 것도 장식 아닌 게 없는 동시에 그 무엇도 장식이라 말 할 수 없는 미학의 절정에 이른 것이 아닌가.


요컨대 어떤 형태의 장식이든 전체의 질서 안에 잘 통합되지 못하면 ‘장식을 위한 장식’이 되고 만다. 잘 절제된 것이 아니라면 장식은 결국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군더더기요, 언제든 갈아치워도 될 법한 껍데기 요소요 언젠가는 도려내야 할 각질일 뿐이다. 이유 있는 장식, 꼭 필요한 장식만이 세월과 함께 오래 지속되는 법이니, 사람도 집도 아름답게 늙어가려면 그 집, 그 자리, 그 주인의 품격에 잘 어울리도록 ‘빛나는 장식’을 이루어낼 수 있는가가 관건인 셈이다. 비록 작은 집을 짓더라도 건물 스스로 ‘빛나는 장식’, 그 품격이 한 치라도 모자라지 않아야 친구와 더불어 그 유서(遺緖)를 찾아 두고두고 즐길만하지 않겠는가.


작은 집 경치 좋은 곳에 열렸으니 / 小菴開勝地

깃들어 살며 무엇을 구하리오 / 棲息更何求

즐거움은 유서를 찾음에 있으니 / 樂在尋遺緖

벗이 오면 그 놀이 함께 하리라 / 朋來共此遊

[기대승(1527-1572), ‘통판 성주와 함께 낙암에서 자고 유생의 운을 써서 이별의 회포를 펴다’ 일부]


오방색 단청의 온갖 재주를 즐기다 또다시 마티스의 볼수록 중독성이 깅한  빨간색 그림을 다시 들여다본다. 단청으로 빚어진 물빛 향연이나 온통 빨갛게 물든 방이 오래 전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더 이상 낯설거나 지겹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이제는 보는 것 이상으로 읽는 재미가 훨씬 더 쏠쏠하기만 하다. 모든 요소들마다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장식 아닌 것이 없지만 이들 모두가 전체에 스며들고 잦아들어 그 어느 것 하나 장식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경계에 들어서면 장식의 기능과 실체가 동시에 사라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럴 때 확연해지는 것은 그 모든 요소들이 ‘그 자리, 그런 모습’의 지위와 자유를 얻는다는 점이다. 장식이 거추장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장식이 보이지 않아야 비로소 빛나는 장식이라는 만고의 진리, 그 흔적 없는 흔적의 패러독스! 그렇게 이유 있는 장식은 끝내 빛나는 장식으로 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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