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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이담 Dec 20. 2023

추억 속 겨울

기억 속에 남은 겨울과 현실의 겨울이 가끔 매치가 안 된다.

창밖에 눈이 내린다. 희한하게 즐겁거나 가슴이 설레거나 하지 않다. 작년 이맘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장소가 회사 사무실이어서 그런가? 그러나 그건 적절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작년에도 같은 사무실, 같은 자리에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이 회사에 입사하고 첫겨울을 맞을 때는 눈이 온다며 살짝 반겼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세 번째 겨울을 맞이하는, 지금의 나는 어떠한 감흥도 없이 조용했다.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를 투닥투닥 두들기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여전히 쌀알 같은 눈이 내렸다.


눈의 크기가 참으로 앙증맞다.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 사라져 버리니, 이래서는 눈 구경도 제대로 못 하겠다. 강원도의 겨울이라면 저러지 못할 텐데…. 그곳에서 겨울을 나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얼마나 추운지 또 얼마나 많이 내리는지 말이다. 강원도에서 20년을 넘게 겨울을 보냈기 때문에, 경기도에서 보내는 겨울은 항상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래서 첫눈이 내려도 무덤덤하게 반응했던 모양이다. 멈췄던 눈이 또다시 내렸다. 여전히 크기는 쌀알이었다. 바람을 따라 흩날리는 모양새가 꼭 가녀린 여자주인공이라도 되는 듯이 흐느적거렸다.


허! 참으로 매가리가 없다.




내가 기억하는 강원도의 겨울은 무척이나 매서웠다. 기온은 늘 영하권. 그래서 강원도에서 입는 옷은 내복 한 벌, 레깅스 한 벌, 두꺼운 바지 한 벌, 상의도 양말도 두툼하게 입고 신어야 기온과 바람에 버틸 수 있었다. 밖으로 노출된 부위는 얼굴뿐이다. 그러나 얼굴도 후드를 뒤집어쓰고 목도리를 칭칭 둘러매어 최대한 숨긴다. 그렇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기 다. 강원도의 겨울은 패션을 논할 수 없다. 이건 생존이 걸린 문제다. 얼어 죽지 않으려면 신체를 노출해선 안 된다. 그렇게 두툼하게 입고 나와 정강이와 무릎 사이에 쌓인 눈을 뚫고 어렵사리 출근한다. 제설차가 지나간 길은 그나마 걸어가기가 쉽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발생한다. 차도는 깔끔하지만, 인도는 걸어갈 수가 없다. 제설차 옆으로 비켜나간 눈이 1미터 넘게 쌓였기 때문이었다. 도로 위에는 사람과 차가 한 데 섞여 거닐었다.


그렇게 투모로우 같은 재난 영화 한 편을 찍고 난 후에야 흐렸던 하늘이 맑아진다. 재촉하던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하늘이 맑아짐과 동시에 바람이 잠잠해진 거 같다. 성인 키만큼 쌓인 눈 옆에 서서 소매 안에 숨겨놓은 손을 꺼냈다. 그러고는 축축하게 젖은 앞머리를 탈탈 털었다. 입김이 닿지 않으니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얼었다. 들이켠 숨을 길게 뱉자 목도리 사이로 하얀 입김이 나왔다. 강원도의 겨울이 고작 이런 모습으로 끝이 난다면,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있지 못했을 터다. 그렇다면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이유는 뭘까?


그건 바로 햇빛에 있다.


구름이 걷히면서 햇빛이 지면으로 쏟아져 내린다. 햇빛을 고스란히 받은 눈은 윤슬처럼 빛을 내며 얕은 바람과 함께 하늘 위로 날아오른다. 나뭇가지에 붙어 날아가길 거부하는 눈도 있는데, 그런 눈들이 얽히고설키며 장관을 이루어낸다. 결코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자연경관이다.


강원도 소백산의 겨울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고 자랐으니, 경기도의 겨울이 흡족하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래도 경기도의 겨울도 시리고 추운 건 마찬가지이다. 한창 겨울일 때는 강원도의 겨울만큼은 아니더라도, 바닥에 쌓일 만큼 눈이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날은 많지 않았다. 어느 날은 이게 겨울이 맞나? 가을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이렇게 변한 원인이 지구온난화라고 했던가, 북극의 얼음이 녹아서라고 했던가.


계절이 걷잡을 수 없이 변해갔다.


불현듯 추억을 더듬다가 창밖을 보았다. 조용히 내리던 눈이 그쳤다. 쌀알만 한 크기로 내리던 눈은 언제 내렸냐는 듯 땅 위에 축축함만 남기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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