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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pr 17. 2024

교통정체가 만든 타워 브리지


도로를 가득 메운 마차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얌체가 모는 마차 여러 대가 인도로 뛰어들어 다른 마차를 앞질러 가려다 길이 막히는 바람에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사람도 걸을 수 없게 돼 차도는 물론 인도까지 엉망진창이 돼 버렸다.


“도대체 이놈의 도로는 언제 풀리려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몇 년째야? 런던시청은 대책을 안 세우고 뭐하는지 몰라. 시장을 바꿔야 돼!”


템스강 변에 있는 런던 타워 인근 도로는 벌써 여러 시간째 마차와 보행자들로 꽉 막혔다. 런던 브리지를 건너려는 마차들이 몰리는 바람에 다른 마차들까지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사정은 강 건너편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도 런던 브리지를 건너오려는 마차들이 교통정체로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1800년대 말까지만 해도 템스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런던 브리지 하나뿐이었다. 런던이 팽창하면서 더 많은 다리가 건설됐지만 대부분 런던 브리지 서쪽에 만들어졌다. 런던 타워 반대쪽인 웨스트민스터 방면이었다. 그곳에 여왕이 사는 버킹엄 궁전은 물론 영국 의회와 정부가 있으니 집중적으로 교통망이 정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런던 브리지 동쪽인 런던 타워 방면은 항구지역이었다. 물류 수송용 외에는 마차가 많이 다니는 곳이 아니어서 과거에는 다리를 놓을 필요가 없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런던 동쪽 인구가 매우 많아진 19세기부터였다. 이때부터 보행자와 차량 통행량이 매우 늘어나 교통 정체가 매우 심해졌다. 도로에 묶여 여러 시간을 꼼짝 못하는 일도 잦아졌다. 통행량 분산을 위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서둘러 대안을 만들어 주십시오.”


교통 정체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지역 주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됐다. 여러 지역 단체가 런던시청에 청원을 넣었다. 건수만 무려 30건을 넘었다. 청원은 여러 가지 내용을 담았다. 런던 브리지를 넓히자는 제안도 나왔다. 강 아래쪽으로 터널을 뚫어 지하철을 만들자는 이색 제안도 접수됐다. 하지만 대다수 요구는 런던 브리지 동쪽에 새 다리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민원에 시달리던 런던시청은 주민 청원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다리‧지하도 건설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하루 물동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조사했다. 당시 런던 브리지 폭은 16.5m였다. 매일 마차 등 차량 2만 2000대가 오갔고, 걸어서 다리를 건너는 사람만 11만 명에 이르렀다. 위원회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지하 도로를 건설하거나 강을 건너는 초대형 페리를 도입하는 방안 등 다양한 대책을 논의했다. 거기서 나온 최적의 결론은 런던 브리지 동쪽에 새로 다리를 놓는 것이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습니다. 런던 타워 앞으로 지나가는 다리를 놓도록 합시다.”


1876년 런던시청은 다리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큰 문제가 있었다. 강에는 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하루 종일 오갔다. 주로 런던 타워~런던 브리지 사이를 오가는 배들이었다. 이 배들의 통행을 막지 않으면서 육상교통에 도움이 되는 다리를 놓는 게 가능한지가 관건이었다. 배 통행량이 많고 언덕이 낮은 템스강에 새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배들은 고대 로마가 영국을 점령했을 때부터 바다와 템스강을 오가며 물류 수송을 맡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도로망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던 당시에 배가 바다에서 강을 타고 바로 올라와 도시 한가운데에 짐을 내리는 것만큼 편리한 물류수송 방안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배들은 바다에서 템스강을 거슬러 올라와 강변 둑에 정박한 뒤 짐을 내렸다. 짐들은 곧바로 마차에 실려 런던 시내를 거쳐 영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런던시청이 다리 설계안 공모전을 실시했더니 50점 이상이 출품됐다. 이 중 일부는 ‘타워 브리지 전시회’에 전시돼 대중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는 런던시청은 원하는 설계안을 찾을 수 없었다.


런던시청이 결정을 못 하는 사이 시간은 흘러 8년이나 지났다. 1884년이었다. 런던시청 소속 건축사인 호래이스 존스가 당시 유명 건축사 존 울프 배리와 손을 잡고 새로운 설계안을 내놓았다. 


“도개교를 만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다리 높이는 강 양쪽 제방 바깥의 도로와 같이 만들고, 교체는 들어 올릴 수 있게 만들면 됩니다. 그러면 마차 통행은 물론 강에서 배가 다니는 걸 방해하지 않게 돼 일거양득이 될 수 있습니다.” 


존스가 내놓은 안은 도개교였다. 교체를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는 다리였다. 사실 그가 도개교 제안을 내놓은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1878년에도 도개교를 만들자고 시청에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런던시청은 그의 제안을 비현실적이라며 거부했다.


세월이 흘러도 대안을 찾지 못한 런던시청은 할 수 없이 존스의 도개교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다리를 건설할 장소는 런던 타워 앞으로 정했다. 당시 그 앞 강변에 부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곳에 새로 땅을 사는 것보다는 런던 타워 앞 배수로 인근 공유지를 활용하는 게 훨씬 저렴했던 이유도 있었다.


런던시의회는 1885년 도개교 건설을 승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에 따르면 교체를 들어 올렸을 때 폭은 60m, 배와 교각 사이의 틈은 41m가 돼야 했다. 새 다리는 런던타워와 조화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조항도 덧붙여졌다. 


당연히 설계안을 내놓았던 존스가 다리 건설 작업을 담당할 건축가로 임명됐다. 그의 원래 디자인은 중세 스타일이었다. 체인으로 교체를 들어 올린다는 것이었다. 존 울프 배리가 여기에 가세해 새 디자인을 덧붙였다. 빅토리아 고딕 스타일이었다. 배리의 부친은 영국 국회 소속 건축가로 오래 일했는데, 고딕 스타일을 좋아했다고 한다. 


본격적인 공사는 1886년 시작됐다. 에드워드 왕자가 기공식에 참석해 초석을 놓았다. 초석 밑에는 다리의 안전을 기원하는 내용을 적은 종이와 동전을 담은 타임캡슐을 넣었다. 원래 예상했던 공사기간은 3년이었다. 


그런데 공사가 시작되고 1년 만인 1887년 그만 존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완벽한 설계도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기본 스케치만 그려진 상태였다. 할 수 없이 보조 건축사였던 조지 스티븐슨이 임무를 떠맡았다. 그는 돌 구조물을 빨간색 벽돌에서 미국 포틀랜드산 석재와 영국 콘월지역의 화강암으로 대체했다.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실제 공사에는 8년이나 걸렸다. 총 공사비는 100만 파운드였다. 


새로 만든 다리는 마침내 1894년 완공됐다. 그해 6월 30일 빅토리아 여왕 대신 나중에 에드워드 7세 국왕으로 즉위한 에드워드 왕자가 다리 개통식에 참석했다. 런던 타워 앞에 있는 다리라고 해서 이름은 타워 브리지로 정해졌다. 


원래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새로운 기념비적 공사가 끝나면 당연히 힐난이 쏟아지기 마련이었다. 이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런던을 상징하는 명소가 됐지만 개통 당시만 해도 타워 브리지는 큰 비난을 받았다. 당시 건축사들의 잡지인 ‘더 빌더’는 타워 브리지를 신랄하게 혹평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건축물 중에서 가장 야만스럽고 엉터리 같은 부끄러운 작품이다.’


타워 브리지의 하이라이트는 다리 가운데 있는 두 개의 탑이다. 스티븐슨은 다리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7만t에 이르는 콘크리트를 넣은 교각 두 개를 다리 가운데 부분에 세워 강에 박고 그 위에 탑을 세웠다. 탑의 높이는 초석에서 89m이다. 탑에는 승강기가 설치됐다. 


두 탑 사이를 연결하는 보도도 있다. 다리를 들어 올릴 때 보행자들이 기다릴 필요 없이 지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다리를 들어 올렸다가 내릴 때까지 6분 정도가 걸렸다. 대부분 보행자들은 서둘러 지나가기보다는 보도에 서서 도개 장면을 구경했다고 한다.


1910년 런던시청은 보도를 폐쇄했다. 이용객이 적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이곳에 성매매 여성들이 몰려 남자들을 유혹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런던을 공습하는 적 비행기를 요격하기 위해 보도에 대공기관총을 설치하기도 했다. 보도는 70년 뒤 다시 개통돼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다리 도개에 필요한 동력은 수력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증기 기계를 이용했는데 전기를 여섯 대의 충전기에 보관해뒀다가 다리를 들어 올릴 때 사용했다고 한다. 1976년부터는 석유 및 전기 동력으로 바뀌었다. 


다리는 86도 정도 올라간다. 처음에는 남쪽 교체를 북쪽보다 약간 일찍 들어 올렸다. 지금은 양쪽을 동시에 들어 올린다. 요즘은 다리를 들어 올리려면 25시간 전에 미리 일정을 공지한다. 다리 양쪽에 있는 교통신호등이 차량 통행을 정지시킨다. 차도는 물론 보행도도 차단된다.


다리 개통 첫 해 타워 브리지 도개 회수는 무려 6160회로 하루에 17차례 정도였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줄어 연간 1000회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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