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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y 01. 2024

트리니티 컬리지 신입생 달리기


“모두 조용히 해. 시선 집중.”


1990년 3월 케임브리지 시내의 한 식당. 트리니티 컬리지 대학생 20여 명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술을 마셨다. 가운데 식탁에 앉은 한 학생이 일어나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조정부의 주장 매튜였다. 그가 말을 시작하자 떠들썩하던 학생들은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모두 많이 먹고 많이 마셨나?”

“예~!”

“오늘 공식 신입생 환영회는 이것으로 끝을 내겠다. 즐거운 시간이었기를 바란다. 다들 기숙사로 돌아가도 좋다. 하지만 신입생들은 오늘 밤 11시 40분까지 그레이트 코트에 다시 모인다. 한 명도 열외는 없다. 알겠나?"


갑작스런 주장의 통보에 신입생들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모두 모이라니 무슨 일이지 싶었다. 매튜의 말 한 마디에 모든 신입생이 얼어붙은 모습을 보이자, 다른 선배들은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그들은 신입생을 왜 불러 모으는지 다 아는 듯한 눈치였다. 


“브라운 선배, 도대체 자정 가까운 시간에 왜 모이라는 거죠?”

“히힛, 가 보면 알아.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야.”


신입생들은 과연 어떤 일이 자정에 벌어질지 궁금해하고 불안해하면서 식당에서 나와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날 밤 트리니티 컬리지의 그레이트 코트 분수대 앞. 두어 시간 전까지 시내에서 술을 마셨던 조정부 신입생이 모두 모였다. 주장 매튜는 시계를 쳐다봤다. 정확하게 밤 11시 40분이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다 모였지? 존슨, 인원을 한 번 점검해봐.”

“응, 알았어.”


존슨이라 불린 학생은 대충 줄을 맞춰선 학생들 사이를 오가며 인원을 세었다.


“주장, 10명이야.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참석했어.”


존슨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매튜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해에는 전임 주장의 강력한 소집 명령에도 불구하고 절반가량이 빠져 난리가 났었는데, 올해는 한 명도 빠지지 않았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튜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인 신입생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흠흠” 하고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었다.


“지금부터 트리니티 컬리지의 전통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겠다. 이 전통을 통과해야 여러분은 진정한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이 되는 것이다.”


매튜가 전통 이야기를 꺼내자 학생들은 더 긴장하기 시작했다. 대개 옛날 조정부 전통이라는 게 기강을 잡는답시고 신입생을 혼내는 게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하, 다들 겁먹은 것 같은데…. 그럴 것 없다. 지금부터 전통이 뭔지 상세히 설명하겠다. 다들 그레이트 코트의 넓은 정원이 보이나?”

“넵~~!”

“이 코트의 둘레 길이는 400야드(약 367m)다. 과거 운동부 선배들은 해마다 신입생이 들어오면 첫 환영회를 치른 날 자정에 이 코트에 모였다. 그리고 정원을 한 바퀴 도는 달리기 대회를 열었다. 자정에는 약 44초 동안 종소리가 24번 울린다. 종소리가 끝나기 전에 코트를 완주하는 신입생은 대단한 행운아로 인정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신입생은 트리니티 컬리지 역사상 한 명도 없었다. 오늘 여러분들이 한 번 기록을 세워보기를 바란다."


매튜 주장의 입에서 뜻밖의 설명이 튀어나오자, 그제야 신입생들은 마음을 놓았다. 전통이라는 게 그런 것이었구나. 입가에 비로소 환한 웃음을 띠면서 신입생들은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매튜는 신입생들을 3~4명씩 조를 짜게 해서 그레이트 코트를 돌도록 했다. 첫 조의 기록은 거의 1분 가까이 나왔다. 두 번째 조는 그나마 조금 나았다. 50초 중반이었다. 사실 육상 남자 400m 세계기록이 43초대인 판국에 367m 거리를 43초에 주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1988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영국의 육상 영웅 세바스찬 코와 스티브 크램이 그레이트 코트에서 달리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은 44초대를 기록했다.


매튜는 마지막 조에 기대를 걸었다. 신입생 중 한 명이 키도 크고 다리도 긴 데다 근육이 좋아보였기 때문이었다. 기록은 못 세워도 좋으니 40초대라도 끊어주기를 바랐다. 주장의 기대를 받은 신입생 4명은 사력을 다해 달렸다. 1코너와 2코너까지는 다들 열심히 달렸다. 그런데 3코너 부근에서 한 명이 넘어져 땅바닥에 뒹굴고 말았다. 


“주장, 큰일 났어. 이리 와봐.”


넘어진 신입생에게 달려간 존슨이 매튜를 불렀다. 매튜는 왜 또 저 호들갑이지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뛰어갔다. 넘어진 신입생은 일어나지 못했다. 얼굴은 고통으로 심하게 일그러진 상태였다.


“왜 그래, 존슨?”

“아무래도 다리를 심하게 다친 것 같아. 신입생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야.”


매튜는 입에서 술 냄새가 심하게 나는 신입생의 다리를 살펴보았다. 발목이 순식간에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크게 다친 모양이었다. 


“존슨, 일단 차에 태워 병원으로 데려가. 나는 학교에 연락할게.”

“알았어. 그럼 나중에 병원에서 봐.”


매튜는 학장을 찾아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학장은 매튜를 크게 나무라지는 않았다. 해마다 첫 저녁식사를 하는 날 자정에 달리기를 하는 것은 학교 전통이었고, 과거에도 다치는 학생들이 가끔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장은 그러나 앞으로 술을 많이 마시고 달리기를 하는 것은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트리니티 컬리지에서는 자정 달리기가 금지됐다. 대신 낮 12시에 학교 측에서 공식적으로 달리기 대회를 열기로 했다. 지금도 트리니티 컬리지에서는 해마다 그레이트 코트에서 달리기 행사가 열린다. 하지만 43초 기록을 세우려고 사력을 다해 뛰는 ‘이상한 학생’은 한 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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