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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l 09. 2024

체코 민족주의의 상징 국립극장

베드르지흐 스메타나는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청력을 완전히 잃은 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광대무변한 어둠의 공간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이 충분히 가라앉은 걸 느낀 그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체코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2천500석 규모인 청중석은 빈틈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만원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스메타나는 악기를 만지작거리는 단원들을 둘러보면서 밝은 표정으로 지휘봉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머릿속에서는 벌써 악보가 조금씩 흘러갔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연한 미소를 지은 그는 힘차게 지휘봉을 흔들었다. 두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1881년 6월 11일 프라하 나로드니 거리의 끝부분이면서 레기이 다리 앞의 블타바 강변에 자리를 잡은 국립극장.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스메타나가 이곳에서 지휘한 곡은 9년 전 그가 직접 만든 오페라 ‘리부셰’였다. ‘체코 건국의 어머니’로 불리는 리부셰 여왕의 전설을 다룬 작품이었다. 그녀는 체코의 세 번째 왕이었고 프라하 건도와 체코 건국을 내다본 예언자였다. 


스메타나가 체코의 전설을 다룬 오페라를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날은 체코 국민의 성원을 모아 건설한 국립극장이 개관하는 날이었다. 국립극장은 ‘체코 음악만 연주하는 공간을 만들자’는 취지로 모금운동을 벌여 만든 민족주의 운동의 결실이었다. 


역사, 그리고 상징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국립극장, 즉 나로드니 디바들루는 19세기 프라하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었다. 체코인에게는 단순한 공연장에 머무는 곳이 아니었다. 민족적 자각이 낳은 성과물이었으며 체코가 독립과 밝은 미래로 나아가려는 큰 걸음을 내딛기 위한 초석이었다. 오페라 ‘리부셰’는 이렇게 뜻깊은 역사적 장소의 개관을 기념하는 첫 공연이었다.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국립극장을 개관하면서 체코 건국의 어머니 이야기를 담은 오페라보다 더 어울리는 곡은 있을 수 없었다.


프라하 국립극장은 19세기 체코에서 거세게 분 민족주의의 결실이었다. 당시 체코에서 모국어인 체코어는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프라하 시민 18만 명 대부분은 체코인이었지만 독일어와 독일 문화가 사회의 주류를 차지했다. 어디에서나 독일 문학작품과 독일 연극, 독일 오페라가 판을 쳤다. 시골에 사는 사람이나 도시의 빈민만 체코어를 사용했다. 


프랑스 혁명 발생 이후인 19세기 중반부터 지식인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먼저 체코어를 되살려야 한다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 이를 위해서는 체코어로 된 연극과 오페라를 공연하고 체코 문화를 널리 퍼뜨릴 수 있는 국립극장을 짓는 게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지식인의 민족주의에 공감한 예술인들은 뜻을 모아 1845년 극장조합을 설립했다. 그들은 체코 역사상 첫 석재 극장을 지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오스트리아 제국에 청원서를 올렸다. 3년 뒤에는 극장 건립을 위해 모금 운동을 시작하겠다는 청원서도 보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두 가지 청원을 모두 흔쾌히 승낙했다.


신바람을 탄 체코 지식인, 예술인들은 1850년 국립극장건설위원회를 설립했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국립극장 건립비 조달을 위한 모금운동을 즉시 시작했다. 모금 운동은 무려 30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귀족은 물론 사회적, 문화적으로 저명한 인사가 모두 기부에 앞장섰다. 여러 클럽과 각종 단체, 노동조합은 물론 공장 노동자와 농민 등 개인도 모금에 동참했다. 심지어 거지도 구걸한 돈을 내놓았다. 정부는 예산 지원이라는 방법을 통해 모금에 힘을 보탰고,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공사 현장을 직접 방문해 금화 5천 개를 기부했다. 


1850년부터 모은 기금은 모두 금화 320만 개에 이르렀다. 국립극장에는 당시에 기부금을 낸 사람의 명단과 기부 금액을 적은 두꺼운 책이 지금까지도 보관돼 있다. 기록에 따르면 프라하 시민 가운데 45%가 모금 운동에 참여했다. 


공사를 진행할 건설비를 충분히 모은 건설위원회는 부지를 고르기 시작했다. 부지 선정 조건은 딱 한 가지였다. 체코의 민족적 자존심을 상징하는 프라하 성, 구시가지, 비셰헤라트 언덕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여러 장소를 물색한 끝에 블타바강 인근에서 조건에 딱 어울리는 최적의 공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염이 심각해서 땅을 정화하는 데 많은 비용이 필요했지만 그곳보다 더 좋은 장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국립극장 건축 설계 공모전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체코 건축가에게 설계할 기회를 줘서 체코인 손으로 직접 건설하는 성과를 이루자는 게 목적이었다. 당선의 영광을 얻은 건축가는 당시 서른세 살에 불과했던 카렐대학교 교수 요제프 지텍이었다. 그는 프라하의 루돌피눔과 카를로비 바리의 온천 분수를 설계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가 당선된 것은 체코인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설계는 모든 측면에서 심사위원단으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았다. 


지텍은 당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인 건축가였다. 민족주의라는 이념에서도 완벽했다. 공모전에 참가한 모든 후보자 중에서 ‘국립극장에 민족주의를 담아야 한다’는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건축가는 그뿐이었다. 지텍의 설계안은 제한된 공간을 이용하면서도 엄청나게 혁신적이었다. 부지가 좁았기 때문에 최종 구조는 부등변사각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곳에 객석 2천500석을 들이기 위해 그는 굴뚝같은 객석을 고안했다. 


1868년에 열린 국립극장 초석 설치 행사는 인근에 만든 임시국립극장에서 거행됐다. 이날 행사에서는 스메타나가 작곡한 오페라 ‘달리보르’가 초연됐다. 귀족의 만행에 저항하다 붙잡혀 프라하성의 탑에 갇힌 달리보르가 고문을 당한 끝에 사형된 영웅적 투쟁을 다룬 오페라였다. 


초석 설치 행사에 사용한 초석 두 개는 보헤미아 건국 전설의 장소인 프라하 북쪽의 집산과 슬라브족이 ‘태양, 전쟁, 승리의 신’으로 모시는 라데가스트가 산다는 동남쪽의 라드호슈치산에서 가져왔다. 나중에 사용한 다른 초석의 경우 체코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지역에서 골고루 가져왔다. 나라가 위기에 빠질 경우 블라니크 기사단이 튀어나온다는 블라니크산, 리부셰가 나라를 세운 전설이 어린 비셰헤라트 언덕 같은 곳이었다. 


123×106×77㎝ 크기로 깎은 초석에는 ‘1868년 우리의 나라를’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기독교 이전 시대 보헤미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였던 플라브스키 언덕에서 발견한 고대인의 손가락 하나를 넣은 상자도 초석 옆에 묻었다. 


국립극장 공사에 사용한 자재는 대부분 체코에서 생산한 것이었다. 벽돌은 성 키릴이 세례를 받았다는 포디빈 연못의 물과 주변의 황토를 섞어 만든 것이었다. 미국 시카고에 사는 체코 동포가 보낸 대리석도 공사에 이용했다. 


체코 국민의 한마음을 모아 건설한 국립극장은 1881년 6월 11일 개관식을 열었다. 스메타나가 만든 오페라 ‘리부셰’를 개관 기념작으로 공연한 이날 체코 안팎에서 내로라하는 명사가 모두 극장에 모였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외동아들인 루돌프 황태자, 그리고 결혼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벨기에 출신의 슈테파니 태자비도 참석했다. 


‘리부셰’가 공연되고 있을 때 국립극장 아치에는 ‘우리의 조국으로’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갈구하는 구호였다. 젊은 황태자 부부는 노골적으로 반 오스트리아 정서를 드러내는 공연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런데 체코 국민의 뜻을 모아 만든 국립극장은 개관 두 달 만에 문을 닫아야 할 위기를 맞았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대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극장이 잿더미가 되고 만 것이었다. 화재의 원인은 나무와 구리로 만든 지붕에 피뢰침을 설치하던 기술자의 실수였다. 초기 진화에 실패해 거세게 치솟은 불길은 국립극장의 지붕, 오디토리움, 무대 등을 모두 태워 버렸다. 불이 꺼졌을 때 살아남은 부분은 전체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국립극장 건립 사업에 참여한 모든 지식인은 물론 기부금을 낸 국민에게는 그야말로 참담한 재앙이었다.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울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볼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체코 국민은 예상하지 못한 대재앙에도 좌절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건설위원회는 모금 운동을 재개했다. 추가 모금 운동에서 45일 만에 금화 100만 개 이상이 모였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극장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금화 1만 3천 개를 기부했다. 러시아의 차르 같은 외국 인사도 복구 기금을 보냈다. 


처음 개관한 국립극장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화재로 샹들리에가 녹아버리자 건설위원회는 거기에서 흘러내린 금속으로 기념메달을 만들어 팔았다. 그 수입이 만만치 않아 극장 재건 공사비에 큰 보탬이 됐다. 온 국민이 뜻을 모아 서두른 덕분에 복구공사는 2년여 만에 끝났다. 재건한 국립극장은 1883년 11월 18일 개관했다. 이번에도 개관 기념 공연작은 스메타나의 ‘리부셰’였다. 


국립극장에는 돌 하나, 기둥 하나, 계단 하나에도 체코인의 민족적 자존심이 서려 있다. 민족주의를 담아 건립한 곳인 만큼 곳곳에는 19세기에 ‘국립극장 세대’라고 불린 민족주의 예술가의 작품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국립극장 정면에는 코린트 양식의 기둥을 세워 로기아(외부 회랑)를 만들었다. 이곳에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폴로 신과 아홉 뮤즈의 조각상이 서 있다. 조각가 보후슬라브 슈니르흐가 만든 것이다. 양쪽 계단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와 삼두마차가 보인다. 원래는 조각가 슈니르흐가 만들었지만 개관 직후 발생한 화재로 파괴되자 그의 제자인 프란티섹 루스, 에마누엘 홀만, 라디슬르브 살룬이 다시 제작했다. 회랑 벽에는 화가 요제프 툴카가 그린 ‘다섯 곡의 음악’이라는 프레스코화가 그려졌다. 다섯 곡의 주제는 신에게 바치는 시, 사랑의 노래, 자비의 노래, 억압당한 자유의 노래, 저항의 노래다. 벽감에는 리부셰의 전설 시대에 살았던 예언가 루미르와 고대 영웅 자보이의 조각상이 있다. 조각가 안토닌 바그너가 만든 것이다. 


국립극장이 자리를 잡은 곳은 ‘국립 거리’라는 뜻인 나로드니 거리다. 19세기 말에 생긴 길이지만 처음에는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았다. 나로드니 거리가 변모한 것은 국립극장 건설 덕분이었다. 국립극장이 건설되자 나로드니 거리에 사람들이 몰려든 덕분이었다. 이후 국립극장에서 시작해 나로드니 거리를 거쳐 바츨라프 광장까지 이어지는 구역은 체코 민족주의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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