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르는마음 Jul 10. 2023

바람이 모이는 곳, 타피누

고조에서의 순간들

성당 뒤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성당 앞 야자수들 사이로 달이 떠올랐다. 어디선가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1박의 일정으로 찾은 섬이었다. S와 나는 섬을 조금 둘러보고 바로 이 섬에 하룻밤을 더 머물기로 결정했다. 이 섬이 마음에 들었다. 1박을 예약한 숙소는 이미 다음날 예약이 차 있어 급하게 예약한 숙소가 위치한 곳이 이 성당 인근이었다. 하룻밤을 보내고 새로운 숙소를 찾아갔다. 성당은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그곳에서는 섬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성당 앞 도로를 따라 건물이 몇 채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의 숙소였다. 반갑게 우리를 맞아준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호스트는 마치 두 발을 잡고 쭉 잡아당겨 늘어난 것 같은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으며 다음날 조식으로 내줄 직접 구운 빵을 보여주었고, 우리를 2층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잠시 쉬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나왔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 미사 시간인지 사람들이 성당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카톨릭 신자인 S가 잠깐 둘러보고 오겠다며 안으로 들어갔고, 그동안 나는 널따란 성당의 앞마당을 슬슬 거닐며 빨갛게 물들다 보라색, 파란색으로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이 풍경 속에 이질감 없이 녹아들어 있는 것 같은 어떤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원래 있던 익숙한 곳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해 도망쳐온 내가, 한국과 한참 떨어진 남쪽의 작은 섬에서 이런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이.


이날 전화로 부른 택시의 번호판을 혼동해 성당에 찾아온 어떤 신도 아저씨의 차에 훌쩍 올라타버린 민망하고 사소한 해프닝이 있었지만, 뒤따라온 택시를 타고 찾아간 해변의 한 골목길에서 우리는 작은 식당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와 함께 곁들인 와인 한 병에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S와 나는 숙소까지 1시간 반의 거리를 걸어가기로 했다. 거리는 깜깜하고 조용했지만 달이 길을 밝혀주었고, 뜨거웠던 한낮의 공기는 알맞게 식어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가끔씩 차가 쌩하고 지나는 것 외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우리는 좋아하는 노래를 크게 틀고,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며 달이 비추는 밤길을 걸어갔다. 마침내 성당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을 때, 깜깜한 하늘 아래 성당이 은은한 빛을 뿜으며 고요하게 서 있었다.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나를 계속 이 섬으로 끌어당겼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곳에서 기도하면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많은 이들의 바람이 이 성당에 모여있었다. 나도 기도를 했다. 어떤 기도를 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미 이곳에서 느꼈던 행복함 만으로도 내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노을 지는 타피누 성당
야자수 사이로 떠오르던 조각달
우리가 걸었던 밤길.
깜깜한 밤 우리를 이끌어주었던 달과 타피누 성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