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흔적ㅣMarking Time by Kathy Miller --Mixed media (48 x 11 x 4 1/2 inches)
치유와 성장이 필요한 순간에 왜 우리는 자꾸 '지식'을 쌓으려고 하는 것일까? 지식의 축적이 지혜를 딛고 상처를 위로해서 깨달음으로 데려가 줄까? 돈을 쌓는 것은 탐욕인데 지식을 쌓아가는 것은 선행일까? 당신은 정말 책 속에서 당신의 꿈과 행복으로 가는 제대로 된 경로를 발견한 적이 있나? 단 한 번이라도? 모래 속에 머리 파묻고 완전 도피한 줄 착각하는 타조처럼 그저 책들 속에 머리를 파묻고 현실 도피 중이었던 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을 즈음, 신지영감의 '습(習)'에 대한 얘기는 깜깜한 동굴의 바위틈에 스며든 새벽 첫 햇살 같았다. 아직은 어둑어둑하나 더 이상 암흑은 아닌. 어쩌면, 절망 끝! 희망 시작!의 시그널 같은...
우리가 '정신적인' 위로나 치유를 필요로 하는 시간은 보통 어떤 시간이었던가? 찬찬히 생각해 보면, 못나고 어리석거나, 물리고 할퀴거나, 자빠지고 넘어뜨리거나, 울고 울리거나 해서 만신창이가 된 채 고장 나버린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얼마나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시간이 흘렀고 흐르고 있는 중인가? 그런데 그 시간의 상처와 고통이 '종교적' 정신승리나 '심리적' 위안, '정신적' 깨달음으로만 치유된다는 것은 너무 게으르고도 상술적인 낚시질 아닐까?
사랑했던 시간 동안 생긴 상흔은 그만큼의 시간을 고스란히 보내고서야 비로소 사라진다는 것을 우리는 숱한 밤을 새우며 이미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지 않은가? 기도도, 108배도, 공부도 그렇게 몸의 기억으로 하는 것이다. "멘탈 관리도 멘탈로 하는 것이 아니라, 피지칼로 하는"1) 것이다. 온몸으로 고통의 진신을 확인해야 고통을 정면 돌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철학이나 역易도 깨달음만으로 득도하게 되는 건 아니지 않을까? 익히는 것, 몸에 배게 하는 것... 체득해야 하는 것 아닐까? 어떻게? 깨닫는다는 것과 체득한다는 것의 차이는 뭘까?
1. 배워서 성인이 될 수 있다면?
"점심때 다 돼서 또 어딜 가게? 영감한테? 둘이 뭔 작당을 한다고 글케 눈만 뜨면 마주보냐? 징글맞게."
'쉬운 길 돌아가기' 달인 문수씨는 해가 슬슬 달궈져 가는 마당 한복판 벽돌 화덕 위에 낡은 가마솥을 올려놓고 힘에 부친듯 뭔가를 젓고 있었다. 엷은 바람이 빨랫비누 냄새를 실어다 코끝을 스치고 공중으로 번져간다. 익숙하고 그리운 냄새다.
"우리 어머니도 도시에 사시는 내내 이렇게 마당 깊은 집에서 속 시원하게 빨래 삶았던 시절을 추억하셨는데... 도시생활 초기에는 꽤 먼 이웃 동네에 이렇게 마을 아주머니들이 모여 빨래를 삶고 말릴 수 있게 해주는 유료 빨래터도 있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곳에 가는 날은 어딘가 꼬불쳐놓은 쌈짓돈 찾아내서 할머니 눈치 안 보고 이웃 아주머니들과 공식적으로 소풍 가는 날이었던 거 같았어요. 막 들떠서 얘기하시는 게... 저도 거기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어요. 아직도 그 느낌이 기억날 정도로..."
"아! 그려~? 엄니가 그걸 아시는 분이시구나. 아이고~ 반가워라. 그랬지. 나는 딱 한 번 가 봤었어, 아직 처자 때 올케랑 동네 아지매들 몇을 따라. 다들 묵직한 빨래 소쿠리를 이고 큰 고개 하나를 넘어가며 힘들게 다녔지. 돌아오는 길에는 미리 아이스케키도 사서 할딱고개 올라 어디 나무 그늘에서 입호강도 하고...
그 재미로 따라갔다가 죽을 뻔 했지만ㅎㅎㅎ. 거기 가면 이것보다 몇 배 큰 가마 여러 개를 걸어놓고 아재가 크고 묵직한 막대로다가 뱃사공이 노젓듯 휘휘 저어 쌌어. 사방천지 이불이며, 옷가지며, 기저귀며... 허옇게 펄럭거리고 있었지. 방금도 설핏 그 그림이 스쳐가던 참이구먼. 찌찌뽕이네? 깜짝이야! 하하하."
뜨거운 김과 땀에 범벅 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아련한 듯 웃는 우리 문수씨한테서는 영락없는 서울깍쟁이 처자였거니 싶은 모습이 아직도 드문드문 피어난다. 더러는 까칠하고 더러는 더할 나위 없이 새침해 보여도 인정머리는 또 그 집 마당 만큼이나 웅숭깊어 동네 젊은이들에게는 '큰손집 누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혼자 사는 양반이 저래 흰 빨래거리를 수북하니 더미로 쌓아놓은 걸 보니 필경 또 작정하고 거동 불편한 동네 어르신들 삶을 빨래를 다 그러모아 왔을 터다.
"근데, 신지 박사님은 왜 그리 구박하시고...."
고맙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한 마음에 장작 나부랭이 몇 개 옮겨다 놓고 슬그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옛 추억 때문인지, 옆에 발라당 누워 원투펀치로 치대고 있는 고양이 '깜이' 때문인지 오늘 문수씨 얼굴 날씨가 봄바람처럼 나긋나긋하다. 오래간만에 보는 빈틈인지라 넌지시 신지영감 변호나 해볼 요량으로 운을 뗀다.
"왜겄어? 이 동네 영감들, 밖에서 하는 행색이나 집구석에서 마누라하는테 하는 꼬락서니들이 어떤지 내가 다 아는데, 여기 모여 앉아서 하는 짓들 봐봐. 선비 동네니 마니 하면서 공자왈 맹자왈 되도않은 100년 전 얘기로 세상없는 성인(聖人) 흉내들 내잖아? 읊어샀는 소리들 들어보면 열두 번도 더 성인이 됐어야 할 거시여. 그러다가, 선거철 돌아오거나 무슨 득실이도 걸려봐. 갑자기 그 성인들 다 어디 가버리고 쉰내 나는 꼰대에 버럭 대는 꼴통들만 바글거리고 있잖아? 또, 논쟁이랍시고 떠벌리는 수준들 하고는... 하! 어찌나 가관인지. 아유~ 사람 사는 거 같은 말은 씨알도 안 먹히는 밥통들이라니까. 딱! 진저리 나."
"그야, 뭐... 경로당 할머니들도..."
"어맛. 얘 봐라? 그 할매들은 애초에 자기가 무슨 선비 입네... 꼴값은 안 떨쟈너! 그 할망구들이나 나는 그냥 원초적으로 떠들고 지지고 볶는 거구. 그리고 집에 가서 영감한테 행패도 안 부리지! 근데, 이 영감들은 1시간이 뭐야? 10분 만에도 갑자기 선비들이 '가스통할배'나 '나라수호대' 들로 돌변한다? 그때부턴 이자들이랑은 대화라는 걸 할 생각을 하면 안돼! 근데 그러다가도 또 안면 싹 바꾸고... 부끄러운 줄도 몰라~, 저 위선쟁이들은. 아주 기가 막힌다니깐. 우째 저래 얼굴 앞-뒤가 다르고, 집 안-팎서 다를 수 있는지... "
"우리 신지박사님은 좀 다른 거 잘 아시면서ㅎㅎ. 공자 맹자 보다 노자 장자를 더 자주 찾는 분이라~ㅋㅋ."
"그런 영감들하고 어울리는 신진지.. 쉰 쥔지는 뭐 다를까? 노자 장자를 배운 게 뭐? 공자는 뭐 꼰대 되는 길을 가르쳤다니? 깡통 안에 공자가 들어가면 뭐 하고 노자가 들어가면 뭐 하누? 나오는 건 어차피 공자가 들어가도 꼴통! 노자가 들어가도 꼴통!인데. 아! 뭐... 성인(聖人)이 배우기만 해서 되는 줄 알아?"
"아니, 그래도... 깡통이라뇨~ㅋㅋㅋ"
"그 영감들이 당최 생각이라는 걸 안 하잖아! 생각! 생각을 하면 뭐가 달라지는지 아누? 부끄러운 걸 알게 돼~. 부끄러운 걸 알면? 반성을 하겠제? 그럼, 아는 척하는 거 하고 처신하는 게 같겠어 다르겠어?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겠어 안 하겠어? 공자가 어쩌구~ 성인이 어쩌구~ 느자구없이 떠들다가도... 여차하면 갑자기 표변해서 왠갖 말도 안 되는 걸 논리랍시고 갖다 부치며 우겨쌌겠냐고?... 가관들이지, 아주."
"뭐 나름 이유가 있겠..."
"이유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딱히 이유고 명분이고 없어. 그냥 저들 편이라는 이유, 저그 지역 사람이라는 이유, 그게 다여. 그런 수준들인데 뭐, 공자고 성인이고 나발이고... 어디 사람 대그빡에 들갔던 거겠어? 깡통 속에 들갔다 나온 거지."
어느새 깜이는 빨래 더미에 얼굴을 파묻고 늘어진 채 잠들어 있다. 그러고보니 길냥이들이 참 좋아하는 빛깔의 햇살이 마당 한가득이다. 뭉툭 삐져나온 까만 발과 궁둥이를 한 번씩 쓸어주고 나서는데, '성인이 배워서 되냐?'는 말의 여운이 어느 철학 교수의 『징비록』소개 글과 함께 이상하게 뒷덜미에 감겼다.
"생각하는 능력이 있으면 잘못한 후에 그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마음을 써서 반성합니다. 생각하는 능력이 없으면 마음을 써서 반성하지 못하므로 잘못을 반복합니다"2)
2. '사람 대그빡'에서 만들어지는 것?
"<오늘의 문수 어록>이 또 하나 터졌다며? 껄껄. 글치! 배운다고 다~ 성인이 되는 건 아니지, 암만."
내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껄껄거리던 영감이 문수씨를 보자마자 인사 대신 아는 체 건넨 말이다. 오늘 신지영감과의 '동네한바퀴'는 나의 미주알고주알 고자질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저는 공자 심은 데 꼴통 나고, 노자 심은 데도 꼴통 나는 '깡통 대그빡'에 한 표요. ㅎㅎㅎ"
"이 영감탱이가 눈 마주치자마자 뭔 쉰소리래? 오늘은 '닥치고 옻닭!'이나 먹어~. 어제 중말댁이 참한 옻을 한 상자나 해왔응께, 군말 없이 무조건 먹는겨! 너두 옻 옮고 이런 거 없었쟈?"
다행히 나는, 아니 우리 집안은 대대손손 옻에 염증 반응이 생기는 체질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양과 예방 차원으로 옻나무 삶은 물을 어디선가 공수해두고, 계절이 바뀌거나 누가 몸이 허해졌다 싶을 때 두루두루 온 가족이 옻 백숙을 즐겼다. 특히, 가마솥에 잘 달인 옻나무 백숙은 그야말로 '뜨거운데도 속이 시원~해지는' 저세상 맛 그 자체였다. 아마도 아침에 빨래 삶던 그 화덕의 오늘 임무는 한 가지가 아니었던가 보다.
"박사님도 글치만, 동네 어르신들이야 어릴 때부터 한학 하신 분들이 여럿이잖아요. 배울 만큼 배운 분들인데, 졸지에 깡통들 되셨습니다ㅋㅋ. 사람 '대그빡'에 들갔다 나오면 뭐가 달라질까요ㅎ?"
"방금 뭐라고? 한학... 뭐?"
"한학 하셨잖아요?"
"그니까... 한학은 배우는 게 아니라 '하는' 거여. 마찬가지로 '공부 배운다' 하냐? '공부한다'고 하지? 생각해 봐. 하는 것과 배우는 거... 차이가 뭐겠어?"
"춤춘다-춤 배운다, 태권도 한다-태권도 배운다, 노래 부른다-노래 배운다... 뭐죠?"
"공부를 중국어로 발음하면 쿵후야. 쿵후하면 딱! 떠오르는 게 뭐야?"
"소림사? 황비홍? 성룡? 아! 이소룡. 사실 저는 '정통 무협'보다는 '동사서독', '신용문객잔' 이런 거 좋아했어요ㅎㅎ."
"ㅉㅉ. 우째 저래 본질만 교묘하게 피해 가는지. '단련'! 쿵후하면 '단련'을 딱 떠올리는 내공 정도는 돼야 문수할멈 말에 댓거리라도 했을 거 아녀. 단련이 뭐여? 몸 공부 쟎냐. 태권도를 잘 하든, 노래를 잘 하든, 수학을 잘 풀든, 영어를 잘 하든, 뭐든 제대로 하는 경지가 된다는 거, 그게 뭐냐면... 다~ 단련이거덩. 몸에 밴 결과물."3)
"그렇긴 하지만... 쿵후도 배워서 하는 것 아닌가요? 공부도 배우는 거고..."
"그러니까... 배우는 거, 거기서 끝날 건지? 배운 다음, 그걸 익혀서 자기 걸로 만들 건지? 이 문제라고~, 저 할미 하는 말이."
"아... 예. 그러니까 배우고 익히... 아! 혹시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4)' 말씀인가요?"
"옳지! 이제 말귀를 알아듣네. 공부란 학과 습을 같이 해야 완성된다는 거여. 근데 저 할미 눈에 저 넘의 꼰대들은 하나같이 '학(學)'만 해가지고 나발거리기나 할 뿐이지 '습(習)'이 안 된 미생(未生)들이란 거지. 서양 애들처럼 공부에는 'to study'만 있는 줄 아는 ..."
"공부가 study잖아요."
"잘 생각해 봐. 니가 지금 쓰고 있는 '공부 하다'는 'to study'만 입력돼 있는 거여. 개념적으로 지식을 확대하는 걸로만. 심지어 지금 우리 교육에서는 '암기하다'와 거의 동의어로 쓰이는 거지. 그런데 공부가 말야, '공부 배운다'가 아니라 '공부한다'가 되려면 최소한 세 가지가 필요해. '쿵후 배운다'가 '쿵후한다'가 될 때도 마찬가지고. 힌트 줄까? 니 입에서 나왔어, 벌써."
"에... 아! 학이시습지? 학.. 습... 또 하나는요?"
"것두 그 안에 있자네. 時. 바로 이것 때문에 잉간들이 뭐든 '하기'까지 안되고 '배우기'에서 끝나는 거여. 춤을 배우는 사람은 많아도 춤 좀 추는 사람은 드물고, 영어를 배우는 애들은 그리 많아도 영어 좀 하는 애들은 드물고... 이게 다 뭣 때문이다? 배우면 그걸로 끝! 익히지 않기 때문이잖아~. 쌓지를 않는 거지. 그럼 뭐다? 다~ 날아가 버리는겨. '깨달았다'? 것두 마찬가지여. 깨닫는 그 순간이 영원할 줄 알어, 다들."
"시습은 '때때로 익힌다. 때때로 복습한다'... 아닌가여? 영어도 수학도 그렇게 하잖아요."
"아휴 참. 쨔샤, 아무렴 공자 형님이 글케 저차원적으로 한 말씀이 이렇게 수 천년씩 회자되겄냐? '시습(時習)'은 '역(易)'의 영향을 받은 거라고 봐야지~. 시중(時中), 때에 맞춰 행한다. 時習, 때맞춰 익힌다.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익힘을 '어떤 때에 맞추는' 것도 중요하단 말여. 그냥 부지런히 복습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
"어떻게요?"
"'학'이 완전 무지렁이가 선생한테 뭔가를 배우는 단계라면, '습'은 그걸 자기화시키는 단계인데... 그게 뭐, 하루 이틀에 되는 일이겠어? 초보일 때 익힐 거, 기본일 때 익힐 거, 중등과정일 때 익힐 게 다 다를 것 아니냐고."
"아...!"
"그뿐이야? 아예 전문과정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습'의 방식과 단계가 있겠지? 또, 그렇게 '습'을 하는 과정이 여러 단계라면 당연히 그때마다 마음가짐도 다 달라야 할 것 아냐? 김연아나... 뭐 한 분야에 난 넘이 된 애들 보면 어때? 나이가 어리든 말든 간에 그 뱉은 말이 벌써 심~오하지 않디? 그게 왜겠어?"
"음... 지난번에 말씀하신 자기 안을 살핀다는 거... 말씀이세요?"
"그래, 자기 점검! 반성할 때도 있을 것이고, 후회할 때도 있을 것이고, 성찰할 때도 있을 것이고... 그런 복잡하고도 고차원적인 정신적 수련까지 당연히 따르는 거지. 그러려면 젤 기본적인 게 뭐냐? 생각이 있어야 할 거 아녀~, 생각. 암기 말고 생각! 선생님 생각 말고 내 생각! 그래야 배워서 얻은 '지식' 나부랭이들이 오롯이 자기 걸로 숙성돼서 '지혜'도 되고, '깨달음'도 되고, 그러다가 '통찰'도 생기는 거지. 그렇게 시간을 먹인 '습'을 통해서야 온전히 미생에서 완생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거지."
"어쩐지 '성인이 배워서 되냐?'는 말이 내내 뒤꼭지에 맴돌더니... 역시 우리 문수씨는 그냥 던지는 말이 없어요."
3. 삶고, 고고, 곰삭히고... 숙성과 축적의 미학
"익힌다는 게 뭐여? 푹 고고, 끓이고, 삭히고... 결국 다 같은 말이쟈녀. 숙성시킨다는 거. 요즘 그럴 여유가 어딨어? 지금이 어떤 세상인디? 소뼈 우린 맛을 우유 섞어 만들어내는 세상이구만."
예고도 없이 무지막지한 팩트 폭격을 날리며 훅 들어오는 문수씨. 생활의 지혜가 깃든 찰진 비유는 기본이다. 그렇다. 지금은 초고속성장 사회, 대량생산 사회. 이런 사회에서 뭘 익히고, 사유하고, 멍 때리며 숙성시키는 일은 무능하거나 게으른 자의 도피처로 여겨질 뿐... '4차원' 취급하는 비아냥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니까, 내 말이! 공부도 뒤에 시간 들고 에너지 드는 '시와 습'은 다~ 빼먹어버렸다는 거지. 그러다보니 당연히 '학'만 남았겠지? 배운 거, 암기한 거... 그다음은 어떻게 되겠어? 고작 그 '지식 나부랭이의 양과 품질'만 가지고 '인간의 품질과 그릇'을 결정해야 되는 거지. 또, 그런 걸 기준이랍시고 그걸로 평가도 하고등급도 정해서 줄 세우고...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그런 지식나부랭이야 죄다 남의 꺼지 어찌 내 것이 돼간데? 한 마디로 도긴개긴, 도토리 키재기 하듯 고만고만한 인간들만 대량 맹글어지는 거지. 공자고 노자고 나발이고는 온통 깡통에 든 거 자랑질하고 넘들 훈계할 때나 써먹을 줄 아는 영감들처럼~."
반박의 여지없는 살벌한 팩트로 영감과 장단을 맞춰가며 문수씨의 상차림이 시작됐다. 오늘따라 에피타이저가 더 후해 보이는 건 착각일까? 농익을 대로 익은 묵은지, 살얼음 낀 동치미, 시래기나물 된장 조림에... 미나리강회, 미나리 부침개까지. 요 며칠 틈만나면 손질하다, 더러 소쿠리에 따로 쟁여 놓기도 하던 푸성귀는 미나리였나 보다. 참, 그러고 보니 여기 뒷마당 구석진 곳, 움푹하니 추진 땅은 늘 미나리 몫이었다. 이끼 낀 돌 뚜껑 위 난잡하게 자라난 잡초들 사이, 흔적만 남아있는 옛 우물 언저리.
"아이구 시원하다~! 역시 할망구 동치미는 예술이야. 도대체 이 션함의 비법은 뭐댜? 뭐 특제 양념이라도 있는겨?"
"있지. 석봉이 엄니가 깜깜한 방에서 석봉이 붙들고 전수해 준 특제 양념!"
"하하. 옳거니! 바로 그거지! 이놈한테 내가 얘기해 주려던 게.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채고, 껄껄. 내가 이 맛에 욕 얻어먹어도 이 할망한테 오는 거여."
신지영감이 무릎을 치며 파안대소한다. 오고 가는 시크함 속에 두 어른은 아주 죽이 딱딱 맞았다. 암튼 할매의 동치미는 정말 대단했다. 아직 연탄 때던 7-80년대 땅속에 큰 독 묻고 어마어마한 양을 장만해두던 시절에는, 연탄가스에 중독된 이웃 여럿을 구한 거짓말 같은 전설이 전해오는 마을의 상징 같은 동치미다. 그나저나 두 양반이 눈치로 주고받는 그 특제 양념은 대관절 뭘 말하는 건지...
"깜깜한 데서 써놓은 글씨나 썰어놓은 떡이 그리 반듯반듯 대가의 경지가 되려면, 대관절 몇 날 밤을 그 어둠 속에서 머릴 맞대고 보냈겠냐고. 어마어마한 양의 시간을 보냈을 거 아냐? 수련의 시간은 그런 거지. 그 시간 안에 한석봉이든 어머니든 그 인생철학도 같이 갈아 넣은겨~. 공부라는 말에는 바로 그 곰삭은 ‘시간’의 향기가 배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단련의 시간 말야. 글치, 할멈?"
"그러니까 그 ‘특제 양념’은 '만 시간의 법칙'... 같은 건가요? 하하."
"옳지. 아! 글쎄, 얼마나 찰떡같은 비유냐~. 내가 이 할망구한테 왜 맨날 '의문의 1패'를 당하는지 알겄쟈?"
이제, 역(易)에 능한 자가 점을 치는 대신 하는 것이 '사유'라는 말의 뜻을 알 듯도 하다. 완생을 향해 걷는 길은 역을 공부하는 내내 사유하는 법을 익히고 익혀, 그 힘으로 자연 세계의 문법을 터득해가는 길이다. 나와 세계를 번갈아 점검하고 살펴보며.
『주역』에서 어린이, 무지몽매함, 어두움, 덮다 등을 뜻하는 <산수몽(山水蒙)괘>의 몽(蒙)자를 『백서주역교석』에서는 '미나리'라는 뜻으로 소개한다. 어둑한 습지를 덮고 뒤엉켜 자라는 덩굴풀이니 고대어의 뿌리가 같아서 일수도 있겠지만, 몽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표현이 유난히 떠오르는 날이다.
"지혜로운 자가 몽매한 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몽매한 이가 지혜로운 자를 구한다. 두번 세번 묻지마라"
늘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그럴 때도 있으나, 그렇다고 의심해서 거북점에 두번 세번 확인하려 들지 말라는 경고도 따른다. 보통, 어른과 어린이 또는 스승과 제자로 치환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산수몽괘>는 혼돈을 의미하는 <수뢰둔괘>에 연달아 배치돼 있다. 혼돈기 또는 혼돈 직후라면, 과연 무엇이 '절대적 위엄'을 유지할 수 있을까?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이, 진리라고 진실이라고 알고 있던 화석같이 고착된 어떤 것들이5) 거짓말같이 산산조각 나버리는 어떤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것. 그럴 땐 오히려 어린애같이 '있는 그대로' 사태를 바라볼 수 있어야(심지어 '지혜로운 노인'이라 할지라도) 그 나날들을 돌파할 수 있다는 것. 그래야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미나리덤불 아래로 자라나는 새로운 희망의 싹을 발견하고 알아볼 수 있다는 것.
이런 메시지들이 이미 2000여년 전부터 인류에게 전송돼왔던 것 아닐까?
1) "운동은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심리적 건강에 중요하다. 원래 운동하다가 요즘 못한다면? 심리적 건강 악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행동을 수정해서 생각과 감정을 변화시키는 치료법을 '행동치료'라고 한다. 정기적 운동이 우울증 위험을 낮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마음건강관리의 꿀팁 3가지!ㅣ정신과 의사 정우열>
2) "독립적인 삶이란 정치적 독립, 국제관계에서 독립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유의 독립입니다. 집단적 사유는 믿음으로 변질되거든요. 집단이 공유하는 이념을 대행하는 자에서 독립적으로 사유하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는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건너가려면 지식과 힘, 즉 내공이 필요해요. 이 둘을 동시에 기르는 일은 독서밖에 없습니다. 독서는 지식의 수집이 아니라 수련이에요. 책 읽는 행위 자체가 고도의 지적 대화예요. 여기에는 인내심, 집중력, 소통능력도 필요하고, 의식을 개방하고 지식을 축적하는 능력도 필요합니다. 이 안에서 힘이 길러지는 거죠.”< 최진석 (사)새말새몸짓기본학교 이사장 | 나는 생각한다, 고로 건너간다>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무언가를 배우고 때맞추어 그것을 익힌다면 역시 기쁘지 않겠느냐? 친구가 먼 곳에서 찾아온다면 역시 즐겁지 않겠느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역시 군자답지 않겠느냐?" 『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