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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텔링주역 Mar 30. 2021

벼랑 끝에 선 당신의 선택은?

<주역 세계관4>  역易에 능한 자는 점占치지 않는다

'쿼바디스'vs'삼태극'




CIRCULATION(순환)ㅣJessica Drrenk ㅣ책 페이지 조각을 소재로 나이테를 묘사함으로써, 책과 그 원료인 목재 펄트 사이의 순환 관계를 표현함.



인생의 벼랑 끝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절실하게 찾게 된다.

ㅡ 점이나 한 번 볼까? 아니면, 어떤 공식적인 종교기관에서의 기도.

ㅡ 이 역경을 견뎌낼 만큼 좀 더 깊은 혜안과 통찰력이 깃든 철학을 쌓았더라면..

인생 일대의 큼직한 위기이자 변곡점이 되는 이런 상황에서 또, 우리는 보통 '깨달음'을 떠올린다. 깨달아서 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기를, 깨달아서 이 상처를 위로받기를, 깨달아서 이 위기를 반전시킬 지혜를 얻기를.


유튜브의 타로 방들을 섭렵하거나, 애먼 친구를 꼬드겨 살그머니 수소문해놓은 점집 방문을 감행하거나, 절로 교회로 성당으로 부지런 떨며 새벽기도처를 찾아든다. 책 펼쳐 드는 것에 그닥 거부감이 없다면 도서관에서 각종 자기계발서, 심리책, 철학책의 제목들과 눈싸움을 벌이기도 시작한다. 혹은 어느덧 중년이라면, '설마 내가 저걸 볼일이...'라며 번번이 눈길을 거두었던 책 『주역』을 주문해놓고, 마침내 인생의 마지막 공부이자 숙제 앞에 선 듯한 오묘한 감회에 젖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미신과 철학의 경계는 그리 먼 게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해본다. 종교와 심리학이라는 두 개의 징검다리만 놓으면 둘 다 '역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환의식과 좀 더 나아지고자 하는 마음'1) 으로 찾게 되는 처방전이기는 마찬가지니. 어떤 처방인가?

불안을 잠재워줄 마약같이 달달한 무엇. 나약한 내가 아닌 외부의 강력한 무엇에 기대면 만사 OK라는 희망고문. 진흙탕 같은 이 모든 현실의 원인이자 해결책은 오로지 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심리만능주의. '스펙쌓기 지옥! 자기계발 천국!' 교. 근거는 없지만 뭔가 비전의 설계도를 손에 쥔 듯한 정신승리 요법.


그러나, 경험적 결과는 어떠했나? 상상만 해도 밀려드는 이 공허함은 뭐지? 운명을 미리 알아버리면 이 고통은 끝이 날까? 과연 솜사탕 같은 뜬구름 위에서 운명의 날만 기다리며 살아가질까? 정말 고통도 사라지고 불안감도 잊혀질까? 아님, 미리 '이생망'2)을 알아내어 기대치를 낯춰 버린다면 마음만이라도 편안해져 해피엔딩 할 수 있다는 걸까? 남은 생, 그저 기도를 통해 한없이 스스로를 낮춘다면 다음 생이라도 지옥 불구덩이 아닌 천당이 기약될까?




1. 신지 vs 문수, 누가 더 쎌까?


감나무집까지 가는 은행나무 산책길 주변은 '코로나' 때문인지 주말인데도 한적했다. 감나무집은 민박을 겸하는 소담한 두 채 한옥인데, ㄱ자형 큰 채와 마당은 식당으로 세 칸짜리 일자형 문간채는 민박으로 쓰고 있었다. 그곳이 주말이나 휴일 내 거처이기도 하다.

까칠한 문수할멈의 뜻밖의 다정함과 손때가 묻어나는 가게 입구 낡은 의자는 어느 날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마냥' 제 집 오듯 찾아든 고양이에게 헌정되었다. 발목 아래만 까매 ‘장화신은’ 이 고양이는 집사의 자발적 섬김 아래 오늘도 햇살방석을 깔고 앉아 꼬박꼬박 졸고 있다. 문간채 아궁이에서 번져 나오는 참나무 타는 냄새를 따라 텅 빈 마당을 가로질러 통나무 문을 밀고 들어섰다. 아래마룻장에 고무 다라며 플라스틱 소쿠리며 잔뜩 늘어놓고 열일 중이던 할멈이 무릎을 짚고 조심스레 일어섰다. 일거리들을 계산대 아래 구석 쪽으로 밀쳐놓다가 퍼뜩 생각난 듯 몇 움큼 작은 싸리 소쿠리에 쟁여 담는다.

"아따~ 젊은 사람들한테 되도 않은 약 그만 팔아싸코 왔으면 어여 주문이나 해~"

"이 집구석에 뭐 주문이라고 할 거나 있어야 말이지. 뭔 할망 고집이... 메뉴 가짓수 좀 늘리라고 몇 번을 말해도 들은 척을 안 하니! 애먼 사람 약장수 취급이나 해싸코 말여."

"저~그 신작로 나가면 메뉴판에 스무 가지, 쉰 가지 씩 벌여놓은 밥집이 널리고 널렸구먼. 뭐단다고 이 산골짝까지 찾아와서 쉰소리를 해쌌는가 몰러~. 객쩍은 소리 해쌀꺼면 딴데가서 먹으면 될거슬!"

"아이고 저 정나미 떨어지게 싸늘한 말본새 하고는... 코로나 때문에 굶지는 않나 싶어 구호 차원에서 들려주면 고마워할 줄은 모르고ㅉㅉ. 닭백숙이나 내와! 옻 말고, 야관문에 푹 고아서~"


또... 또, 신지영감이 짓궂게 시비를 건다. 사실 가게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그 묘하게 능글맞아지고 개구져지는 영감의 얼굴을 나는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 가만 보면 마주치면 기싸움부터 거는 수탉처럼 단 한 번 이기지 못하면서도 들어서는 순간 으르렁거리기부터 한다. 두 어른의 대면 현장을 대여섯 번 지켜보며 내린 결론은, 할멈이 '문수'라고 불리는 까닭 때문이었다. 영감이 약장수로 불리는 까닭과 일맥상통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세상모르는 거 없다는 듯 구라를 풀어제끼는 신지 영감이 할멈 눈에는 고까웠던 것이다. 할멈한테 앵기는 인성꼬라지(할멈 표현이 그렇다는 거다)로 봐서는 당최 언행이 불일치한 인생인 주제에 허구헌날 사람들 몰고 와서 약 파는 꼴이라니! 게다가 신지박사라니!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해서 감정 팍 실어 붙여준 이름이 '약장수ㅡ가끔은 약팔이'였다.

그런데, 신지영감 입장에서 그건 꽤나 억울한 일이었다. 마치 나름 득도했다고 이제 대승적 실천행을 하겠노라 큰맘 먹고 나선 원효 앞을 사사건건 가로막으며 시험하고 조롱하고 엿먹이다 결국에는 '의문의 1패'를 안기고야 마는 심술쟁이 문수보살3)을 꼭 닮은 듯했다. 해서 어느 날 1400여 년 전 문수보살이 21세기에 문수할멈으로 '갑툭튀' 내려온 것이다. 사사건건 갈굼 당하면서도,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톡 쏘는 그 ‘일리’있는 할멈의 잔소리가 싫지 않은 듯 신지영감이 붙여준 애칭이었다. 영감의 빈틈을 사정없이 파고드는 할멈의 그 벌침 같은 ‘일리’들은, 꿀잼이기도 했지만 내게도 한 번씩 뒤통수 맞은 듯 아차! 싶은 각성제가 되곤 했다. 그래서 단 한 번 살가운 말로 반겨준 적 없는데도 영감과 나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산책길 마무리 코스였다.


"그게 다 환란에 빠지면 신통력에 기대려는 마음이 생겨서쟈너. '한 방에' 돌파구를 찾든가, 한 방에 깨우치든가. 근데 사실 신통이 반드시 득도한 지혜는 아니거덩? 신통력과 지혜는 차이가 있지. 암튼 그놈의 '한 방에'가 문제여~."

영감이 은행나무 길 위의 강의를 이어갔다.

"미신과 철학의 차이 같은 건가여?"

"뭐... 철학을 뭘로 볼 것이냐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불가에서는 다섯 가지 신통력이 있다고들 하지.4) 첫째는 의통(依通)이라고... 어떤 물건에 의지해서 신통력을 발휘하는 경우야. 주역점 볼 때 쓰는 시초나... 뭐 쌀알 같은 거나 관상 같은 것도 돼~"

"타로카드도 될 수 있겠네요? 화투점이라면, 화투도?"

"뭐 안될 거 없지. 그걸로 신통해지기만 한다면야~. 요통(妖通)이나 귀통(鬼通)이란 것도 있는데, 이건 일종의 병리 현상이여~ 정신분열 증세 같은 거."

"‘귀신 들렸다’고 하는 상태요? 요통은 요괴 붙은 거구? 요물같다 라든가 마구니가 끼었다라든가..."

"넷째는 타고나는 게 있는데, 보통(報通)이라고 하지. 전생에 열심히 닦은 도 덕분에 전생의 재능이 현생에도 이월되는 거여. 흔히들 '전생의 고수가 환생했다'고들 하잖아. 그런 거~"

"다섯 번째가 수통(修通)이야. 도법이나 불법을 배우거나 수도해서 수양이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도 신통력이 생긴다는 거지. 전생이 아니고 이 생에서 닦은 도로 말야."

"뭐에 의지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신들리거나 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요? 그니까... 득도?"

“글치. 유일하게 ‘한 방에’ 못 얻는 거~. 그런데 그렇게 오랜 시간 수도를 통해 득도한 건 신통이라 하지도 않아. 신통력을 쓸 일이 없으니...” “왜요?”

“옛 어른들 말씀이 ‘역에 능한 자는 점을 치지 않는다’ 했거덩.

“글쎄, 그 이유가 궁금하다구요.”




2. 문명이자 분별과 차별의 상징ㅡ예禮


역(易)은 지식 백과사전이자, 처세가이드이자, 심리학서이자, 철학서이자, 수행서 등 종합교양서적이다.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 따라 팔색조 같은 얼굴과 용도로 다가선다.

"우선, 그 易이 가장 본격적인 역할을 했던 고대 시절 당시5)는 어떤 사회였을지 한번 상상해봐. 그때 리더의 고뇌는 무엇이었을까? 논어를 읽다 보면 공자형님한테서도 얼핏얼핏 이런 고뇌가 느껴지지 않더냐고."

'얘들을 언제, 어떻게 '사람'으로 맨드냐이~?'

당시만 해도 사실, 문명의 초입인지라 인간과 짐승의 구분이 모호했을 것이다. 나무에 올라 원숭이나 새와 어울려 놀고 동네 뒤편 언덕만한 향유고래라도 마주칠라치면 마을 어르신 마주치듯 움찔 경건하게 매무새를 챙기던 습속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뭇 짐승들을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의식 따윈 상상도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아직 ‘문명이전'의 상태인 인간과 이미 ‘문명화된' 인간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었던 셈이다.


"이런 세계에서 리더와 교육자의 가장 큰 숙제는 뭐였겠어? 잠시 눈 감고 추체험을6) 한번 해봐 봐. 아마도 짐승과 분별되게 할 ‘인간 됨’의 기준을 세우고 교육하는 일 아니었을까?"

여기서 ‘예(禮)’가 생겨났다. 요즘처럼 꼰대문화를 상징하는 번다한 절차나 허례허식이 아니라, 禮의 첫 미션은 동물적 삶과 인간적 삶과 가르는 기준을 세우고 인간 고유의 삶의 양식, 그러니까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하는 것이었을 테다.

물론 禮의 그런 태생적 성격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모든 영역에서 부당한 분별과 차별을 양산하고 상징하는 명분으로 변질된 근원이기도 할 테지만... 어찌 됐든 그 본래 소명은 원시사회의 동물스러움으로부터 인간스러움을 분리해내는 것이었고, 그것을 ‘문명’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니 禮는 곧 문명이다.

"이 개념을 잘 기억해두면, 노자나 장자가 禮와 문명을 동시 타격하는 까닭이 이해가 될겨~. 그리고 왜 노자가 분리되고 쪼개지기 전의 ‘통나무로 회복’하라고 강변하는지도 어렴풋이 짐작이 갈 것이고. 노자 입장에서 禮는 ‘동물스러움으로부터 분리'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모태) 세계로부터의 이탈'의 문제로 여겨졌던 거거덩."


다시 추체험 엔진을 작동시켜보자. 학교에 가면 꼭 선행학습을 해오든가 월반해 가면서 남들보다 앞서가고자 하는 쓸데없이 성실하고 적극적이고 착한(쌤 눈에) 학생들이 있다. 그 시절이라고 왜 없었을까? ‘인간 되기’ 학습이 쏠쏠한 재미와 뭔지 모를 장밋빛 미래를 품고 있다는 것을 느낀 이른바 ‘우등생’이. 해서 이들을 위한 보다 고급 버전의 미션이 주어진다.  ‘누가 보든지 안보든지, 스스로 절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진정한 동물과 인간의 차이니라...블라블라’

이런 엘리트용 고급 과정의 에센스로 세련되어진 ‘예(禮)’의 궁극 버전이 아마도 ‘신독(愼獨)7)’의 원형일 것이라 감히 추측해본다.(이 글의 장르는 나름 ‘소설’이다. ‘문학적 허용’ 찬스를 쓰겠다는 말이다) 아마도 '엘리트 지향 DNA'는 이렇게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신독을 실천해낸다면, 완벽하게 동물로부터 분리되어진 존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신독의 지극한 성공 사례가 지금까지도 단군신화 속에 그야말로 신화로 남아 전해오고 있다. 웅녀와 호랑이 이야기. 신독에 성공해 禮를 익혀 인간계에 입성한 웅녀와 신독에 실패해 禮를 모른 채 군자의 나라에 입성하지 못한 호랑이. 그래서 나온 표현일까? ‘이 예의도 모르는 짐승 같은 놈을 봤나!’ 같은 드라마의 단골 대사 말이다.

암튼, 곰이 인간이 되기까지 100일이 걸렸다고 한다. 기억해놓자. 100일. 신독과 시간. '한 방에'는 없었다. 그래서 호랑이는 떠났다. 뭐, 그건 또 호랑이 인생이다. 아니, 호생.




3. '쿼바디스 도미네' vs '천지인 삼태극' 


이런 시점에서 인류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신의 섭리에 따른 삶 vs 자연의 이치에 따른 삶.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은 두 갈래 길 앞에 섰다.



한 문명에서는 인간의 미래를 형이하학적인 실물 따위가 아니라 어딘가 신비로운 정신계의 이상으로부터 찾았다. 인간이 나아갈 바의 모델이 될 ‘그것’은 종교적 단계에서는 우주를 창조한 미지의 '주재자'였고, 철학적 단계로 넘어오면 '이데아' 또는 ‘물자체’8)였다. 이런 세계를 선택한 인류의 근원적 질문은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였을 것이다. 인간이 나아갈 길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초월적 절대자로부터 내려지는 ‘계시-신의 섭리’에 있었다.9) 그 오랜 서양의 철학 논쟁사 속에 분리되기 전의 모태였던 자연과의 관계 설정에 대한 고뇌와 사유의 흔적은 거의 없었다.

반면, 또 다른 문명에서는 '천지 사이는 풀무와 같다'(『노자』)라며 쑥과 마늘을 주어 동굴 속에서 자기 안으로 침잠하게 하였다. ‘풀무10)와 같다’는 것은 '우주의 생성과 소멸의 반복 작용은 어떤 주재자에 의해 조정되거나 운용되는 것이 아니라, 풀무의 왕복처럼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생명 에너지 운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천지에 참여해서 만물의 화육을 돕는다(『중용』)'고 선언한다. 노자의 '잔소리'?(우환?)를 의식한 것일 터.

“인간의 지혜는 천지의 결함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인간 지혜의 가치, 인간 능력의 가치는 천지에 참여해서 천지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위적인 것이라고 경시해서는 안됩니다.”11) 이렇게 분리와 동시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 이 과정에서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사유의 흔적도 보인다. ‘천지인-삼태극’의 출발이다.12)



침잠의 시간 동안 곰에게 주어진 미션은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생명 에너지의 일부인 자신을 자각하는 시간이자 동시에 자신 안에 있는 야수의 본능을 발견하고 지워가는 과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문명을 선택한 인류의 첫 질문은 당연히,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아니었을까? 헤르만 헤세도 자기에게 가는 길이 가장 어렵다고 했다. 인간은 자기를 향해 걸어야 비로소 성장하게 되니까.13)


이렇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들을 거쳐 수양이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에게 생긴 신통력을 수통(修通)이라 한다. 그러니까 修通을 통해 신통력을 얻는 과정은 자연과 세계의 순환 법칙과 원리를 체득하고 동화되며 ‘천지와 하나 되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곧, 쓸모에 의해 '문명의 인위적인 지혜'로 의자가 되거나 가구로 쪼개지고 변형돼 버린 세계를 이전의 통합된 '하나'의 세계인 통나무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아이인 때나 개나 고양이, 닭...처럼 천진난만한 상태로. 이들은 자연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

"설령, 다시 '지혜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쪼개어진다 해도 그때마다 또 '회복'하고 '회복'하며 통나무로 돌아와야 해. 그래야 우리는 원래 태어났던 그 세계를 망각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돌아오는 길조차 잃어버릴 만큼 너무 멀리 가버리기 전에 통나무로 돌아와야 하는 거지. 그래서 나이를 먹으면 수련을 시작해야 하는 거야. 멀리 밖에 있는 파랑새를 쫓는 거 말고,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고, 끊임없이 수양해야 하고, 끊임없이 신독해야 한다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끝도 없이 해체되는 '나'의 전체성과 통일성을 끊임없이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자꾸만 끊어지는 나와 세계를 잇는 끈을 끊임없이 다시이어주기 위해서였다. 천지인-삼태극의 n분의 1로 살아가기 위해. 그리하여 어느 날, 우리는 바람보다 먼저 눕는 풀처럼, 기미나 징조만으로 지진을 감지하고 홍수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역을 한다는 것은 이렇게 자연계의 조짐을 놓치지 않을 감각기관의 촉수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과한 해석일 수도 있지만, 온갖 쪼개짐과 세련되어짐으로부터 우리가 이 촉수를 잘 지켜냈더라면, 태생을 잊은 문명에 대한 징벌 같은 코로나의 경고도 진즉에 감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쿼바디스 도미네!를 외치거나 이데아를 갈구하던 문명에게는 절대자와 인간을 제외한 그 모든 것은 그 여정에서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든가 활용해야 할 수단과 도구에 불과했다. 어딘지도 확실치 않은 그 ‘목적지’를 향해서라면... 지혜와 철학은 그것을 더 효율적으로 달성하도록 지원하기 위해 존재했을 뿐이다. 그 결과 이 문명은 바로 불과 몇 세기 만에 인류의 삶을 이토록 급속도로 발전시킨 장본인이 되었다. 더불어, 코로나에 속수무책 점령당한 바로 '지금! 여기! ' 전 지구인의 세계관을 리더 해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실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문득, 어느 선승의 오도시14)가 떠올랐다.


종일 봄을 찾았어도 봄은 보지 못했네

짚신 신고 산머리 구름 위까지 마중 나가보았지

집에 오는 길 돌연 매화 향기 느끼니

봄은 앞 뜰 가지 위에 어느새 와 있었네


하마터면 '내 안'이 아니라 '나의 밖'만 쫓다가 갈기갈기 찢기고 쪼개진 자아를 끌어안고 여생을 살아갈 뻔했다.



"역에 능한 자는 왜 점치지 않는가?" 피상적으로 보자면, 구태여 점을 치지 않더라도 역을 해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얘기는 지진의 전조에 이미 길을 나서는 새나 쥐 떼들처럼, 기미와 조짐을 느끼면 역의 64괘 384효의 어디 즈음에 착점해서 그 과거-현재-미래로의 변화 양상을 살펴봐야 할지 이미 체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역에 능한 자는 "점 따위는 보지 않는다”가 아니라, “점을 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본질적인 이유는, 역에 능한 자는 역의 궁극이 '점'이 아니라 '자연 세계 읽기'라는 걸 깨친 자이기 때문이다, 역은 자연의 변화에 대한 기록이므로. 하여 수도를 통해 신통해진 자는 곧 자연계 언어의 문법을 깨친 자이다. 그래서, 세계(천지-자연-통나무-숲)의 일부가 되어 함께 흔들리고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 역을 하는 까닭이라는 것을 체득한 자들이다.


"그럼, 역에 능한 자는 점을 치는 대신 무엇을 하게 될까?" '사유'다. 자기를 보고 세계를 보며, 자연 세계의 문법을 터득해가는 것은 사유의 힘이다. 역이 미신에서 철학으로 건너갈 수 있었던 비법이자 경위는 바로 이렇게 '사유'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진 주역의 구조였다.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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