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든 남는 것이 없어야 한다.
정신과 의사가 환자의 죽음을 대면할 일은 생명을 다루는 다른 과 의사에 비해 월등히 낮다. 하지만 그럼에도 환자의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바로 환자가 자살하는 경우다. 때문에 정신 의학에서는 자살을 정신과적 응급상황으로 규정하고 자살에 관한 이슈에 대해 철저하게 다루도록 배운다.
교과서에는 자살의 여러 가지 종류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회적 자살,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등등. 사회적 자살은 사회적인 분위기에 따라 개인의 자살을 강요받는 것이며, 이기적 자살은 환자의 개인 정신병리에 의해 죽음을 겪는다는 분류이다. 교과서에서는 이런 여러 자살의 종류에 대해 기술하고 있지만, 나의 철학은 다소 상이하다.
나는 자살은 크게 두 가지 범위로 나뉜다고 보고 있다. 아니 자살보다 더 큰 범주인 죽음 또한 그렇게 나뉠 수 있다고 본다. 바로 살아생전 얽힌 것 없이 죽는 것과, 마음속에 앙금이 남는 채로 죽는 것이다. 보통은 일반적 죽음보다 자살의 경우 마음속의 앙금이 남은 채로 죽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단 자살을 그 두 가지로 분류하여 다음 사례를 통해 생각해보자.
45세 A 씨는 최근 여러 가지 생각들로 인해 너무 힘들다. 일상생활을 해보려고 해도 자꾸 이런저런 생각이 나서 불안하고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죽으면 이 고통이 끝난다고 생각하게 되어 죽음을 결심한다.
60세 B 씨는 최근 췌장암 말기 진단받았다. 그는 진단받았을 때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굳게 먹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변 정리와 마음 정리가 끝난 뒤 더한 고통이 엄습하기 전에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첫 번째 사례 같은 경우 누구라도 죽음을 말릴 것이다. 하지만 자살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사례의 경우 윤리적 쟁점이 생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자신의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은 안된다고 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B 씨의 입장을 이해하여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때문에 연명의료, 의사 조력자살 등 여러 가지 이슈가 생성되고 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는 두 번째 사례 같은 경우 또한 자살에 대해서는 엄격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국가들은 불필요한 연명의료 중지나 의사 조력자살에 대해 허용적인 입장을 취한다. 우리나라의 트렌드도 앞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죽기 전에 마음속 앙금을 푸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죽음을 앞두게 된 것을 알게 된 순간에는 더더욱 더 말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 인구 감소세가 증가세를 앞지르는 데드크로스가 있었다. 죽을 사람이 태어날 사람보다 많은 시대, 앞으로 죽음에 관한 문제는 갈수록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수많은 죽음을 맞이할 때 정신과 의사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부디 죽음에 앞둔 사람들의 앙금을 풀어주는데 정신과 의사가 일조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