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하는 나의 경계
나의 경계는 내가 생각한 만큼까지입니다.
오늘은 나의 경계에 대해 다방면으로 살펴보면서 왜 첫 줄이 맞는지 논증합니다.
먼저 생물학적 접근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나의 경계를 피부로 잡습니다. 피부 안쪽은 나, 바깥쪽은 다른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애매합니다. 우리의 피부는 매일 탈락합니다. 피부 바깥쪽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세포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면 피부 맨 바깥쪽은 내가 아니고, 그 안쪽만 나인가요? 이렇듯 경계를 잡기가 모호합니다.
또한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습니다. 음식은 우리가 보기에 명확한 타자입니다. 그 타자가 쪼개져서 흡수되어 내가 됩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분자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교체됩니다.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시간적 측면에서도 나의 경계를 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다음으로 정신적 측면입니다. 정신적으로는 나의 경계가 명확해 보입니다. 하지만 어렵습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정어리 떼를 본 적 있나요?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정신의 경계가 나누어진 개체가 아님을 이미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흔히 정신적 경계를 정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참견입니다. 우리는 가깝다고 여기는 대상을 정신적으로 나와 같은 범주안에 둡니다. 그래서 그 대상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못 참아합니다. 수많은 부부의 이혼도, 양육의 실패와 반항도 이러한 경우에서 발생합니다.
정신적 경계를 설정하기 어려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계성 인격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경계를 설정하기 어려워 쉬이 사랑에 빠지고 사람에 빠집니다. 쉽게 동조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계를 명확하게 알고 싶어 하며 자해를 합니다. 물론 자해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문맥을 위해 여기까지만 얘기합니다.
우리는 커가며 나의 경계를 설정합니다. 처음에는 나와 세상의 경계가 없습니다. '나'라는 표현도 어색하고 개념도 잘 모르겠어서 자신의 이름을 3인칭으로 부르며 칭합니다. "ㅇㅇ이 쉬했어."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아이 셋을 기르며 많은 아이들과 직, 간접적으로 접해왔지만 처음부터 '나'라는 개념을 능수능란하게 쓰는 아이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청소년이 되어 정체성의 위기도 겪어보고 비로소 자신과 세상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 짓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처음 날 때처럼 세상도 나고 나도 세상이면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등도 남이 긁어줄 때가 더 시원하고 밥도 남이 떠먹여 주면 더 좋습니다. 수많은 서비스업들이 발달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얻고 싶지 나 자신으로부터 얻는 것은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온 것이고 세상과 나를 구분 짓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듭니다. 에릭슨이 말한 노년의 정신적 과제는 통합입니다. 세상과 나를 통합합니다. 정신을 통합하고 후에 죽음으로써 몸이 통합됩니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기에 여러분, 우리 자신의 경계는 우리가 생각한 대로입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시기에 따라 모두 제각각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까지만 '나'의 경계에 포함할 수 있고, 가족까지만 포함할 수 있고, 공동체, 지역, 나라, 전 세계, 온 우주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저 또한 오늘도 통합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나의 경계를 넓히기 위해 힘씁니다. 이것은 하나의 수렵입니다. 내 몸이 병이 났다고 몸에게 화내는 사람은 없지요. 그렇듯 외부 환경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일 때 외부로 점차 나의 경계를 넓힐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웃이 내 몸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