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동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내 이름이 크게 써 있는 겉표지를 보고 깜짝 놀라 당장 빌려왔다. 미국살이를 시작하고 하나둘 이름을 트게 된 이들이 생겨나던 시기였다. 'Yoon Joo'라고 열심히 소개를 하는데 도대체들 제대로 발음도 못하고 기억도 못하는 것이 혼자서 화가 나고 있던 참이다. 그렇다고 새삼 미국 이름을 만들자니 영 어색하고 내 이름 같지도 않고.
그런데 떡하니 "내 이름은 Yoon이야!"를 발견했으니 그 반가움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만하다. 1인 시위라도 하는 기분으로 '그럼그럼… 내 이름은 Yoon이지! 아무렴~하하' 뭐 그런 생각을 하며, 대출한 책들 여러 권들 중에도 제일 위에다 이 책을 딱 올려놓고 보란 듯이 도서관을 나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시작한 그림책 읽기는 도서관에서의 설렘 만큼 그닥 신통치 않았다. 아직 두 살, 다섯 살 딸에게는 글밥이 너무 많았던 것. 게다가 이미 온갖 화려한 미국 디즈니 공주에 한껏 노출된 상태였으니, 납작하고 동그란 얼굴에 눈은 잔뜩 치켜올라간 여자 아이 그림이 아이들 흥미를 자극할 리 만무였다.
아무리 한국인의 전형적인 얼굴이 그렇다 해도 어른이 보기에도 딱히 와닿지가 않았다. "아니, 좀 과장이 심하지 않아? 분위기도 어쩐지 다른 나라 느낌에 더 가까운데… 게다가 웬 고양이, 새… 이미지도 안 어울리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시큰둥하니 읽어 치운 기억이 난다.
이후에도 두어 번 더 빌려다 보곤 했지만 여전히 그냥 그런 그림책 중 하나였을 뿐이다. 영어그림책 독서량이 늘어갈수록 에릭칼, 닥터수스, 앤서니 브라운, 이브번팅, 에즈라잭키츠 등 아이들이 선호하는 작가와 작품, 좋아하는 캐릭터들이 마구 늘어가게 되었고 여전히 한국소녀 '윤'은 관심 밖이었다.
2.
그러던 어느날, 미국살이 3년쯤 지난 어느날 밤 아이들이랑 다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첫 장 첫 문장이 새삼스레 왜 이렇게 '쿵' 하는 느낌으로 읽히던지 이상했다.
"My name is Yoon. I came here from Korea, a country far away."
게다가 정말 신기했던 건, 두 딸 역시 이번엔 책을 읽는 내내 눈을 반짝이며 몰입해 있는 게 아닌가. 다 읽고 나서는 둘이 동시에 내뱉은 말, "I like this book!", "엄마! 이 책 정말 좋아요!"
참 신기하다. 엄마가 몰입해 읽어준 까닭인지, 아님 아이들도 그새 자라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까닭인지, 아님, 미국살이 몇 년 동안 마음에 쌓인 것들이 오히려 맨처음 그 시절보다 '윤'의 이야기를 공감하게 하는 매개로 작용한 까닭인지.
3.
식탁 앞에 마주 앉은 아빠와 주인공 '윤'. 아빠는 영어로 이름을 써 주면서 이제 미국에 왔으니 이렇게 이름을 써야 한다고 가르친다. 영어로 이름 쓰는 법을 연습해 가면 낯선 미국 학교 적응이 좀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하는 아빠의 바람이었을 터. 그런데 '윤'은 속으로 이런 생각들을 한다.
"나는 아무리 봐도 'Yoon' 같지가 않았어요.
선이며 동그라미들이 전부다 따로따로 서 있는 느낌이었어요.
한글로 쓴 내 이름은 행복해 보여요.
글자들이 같이 춤을 추는 것 같거든요.
한국말로 내 이름은 '빛나는 지혜'라는 뜻이에요.
나는 한글로 된 내 이름이 더 좋아요..."
그리고 다음 날 처음으로 학교에 간 '윤'. 선생님이 칠판에 'CAT'이라고 크게 써 놓고 뭐라뭐라 한참 이야기를 해 주신다.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는 주인공. CAT과 관련된 것 같은 노래를 즐겁게 부르는 미국 아이들 틈에서 자기도 그 예쁜 노래를 따라 부르려고 노력해 가며 앉아 있는다.
선생님이 잠시후 빈 종이를 나눠 주시면서 이름을 써 보라 한다. 'YOON'이라고. 그런데 우리의 귀여운 주인공 소녀 '윤'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YOON' 같지가 않다. 그래서 그 종이에 가득 'CAT'을 써 버린다.
CAT'이든 'YOON'이든 이제 막 미국에 온 한국 소녀 입장에선 어차피 선과 곡선으로 된 기호일 뿐, 특별한 의미가 없는 법. 게다가 어쩌면, 반 친구들도 선생님도 모두들 열심히 의미를 부여하며 이야기하고 게다가 노래까지 부르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이는 'CAT'이 차라리 'YOON' 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간 소녀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며 창 밖에서 놀고 있는 새를 그린다. 자기처럼 친구도 없고 외로워 보이는 작은 새를…. 그림을 본 아빠는 작은 새 그림 아래 'BIRD'라고 써 준다. 다음날 학교에 간 소녀는 또 이름 대신 'BIRD'를 잔뜩 써 버린다. 새가 되어 하늘을 훨훨 날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상상을 하면서. 아이에겐 여전히 'BIRD'나 'CAT'이나 'YOON'이나 큰 의미 없는 기호일 뿐.
그러던 어느 날,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어떤 미국 여자 아이가 컵케이크를 건네준다. '윤'은 살짝 미소를 짓지만, 여전히 'YOON'이 되기는 싫었다.
교실로 돌아온 윤, 이번엔 종이에 가득 그 미국 소녀가 가르쳐준 'CUPCAKE'를 잔뜩 써 버린다. '내가 차라리 컵케잌이라면 친구들이 모두 나를 보며 박수치고 반가워하고 좋아할텐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번엔 종이를 받아든 선생님 얼굴이 활짝 웃는 것처럼 보였고, 소녀는 속으로 '어쩌면 이 선생님이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다. '다르다는 건 어쩌면 좋은 거일 수도 있어…'라는 생각과 함께.
다음날 학교에 간 주인공 '윤'. 이번엔 처음으로 종이에 한가득 'YOON'을 쓴다.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꼭 안아주며 좋아하고, 마지막에 소녀는 혼자 말한다. 얼굴 가득 눈부신 웃음을 머금고서.
"그래요 나는 YOON이에요.
이제 나는 영어로 이름을 쓰지만
그 속뜻은 아직도 '반짝이는 지혜'라는 뜻이에요."
작은 한국 여자아이가 커다랗고 휑한 땅 미국에 와서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이보다 더 아름답고 울림이 있게 그린 그림책은 아직 못 만났다.
* My name is Yoon / by Helen Recorvits, Gabi Swiatkowska / Frances Foster Books / 2003 / p.32 / preK-G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