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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에스 Apr 22. 2021

아이만 생긴다면 세상 무엇이든 두려울 게 없었다

난임 일기에서 환장 육아일기로-


미혼일 때 간절한 꿈은 결혼이었다

독립을 하고 싶은데 무남독녀 외동딸인 나에게 지나치게 큰 관심을 갖고 계시던 부모님 덕분에 독립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남편을 만나 2년 만에 결혼하게 되었고 결혼과 동시에임신 준비가 시작되었다. 아이를 좋아했다.

지나가는 아이들의 미소만 보아도 행복해졌다.



그 당시 너무 건강했고, 늘 운동도 하고 있었고,

다이어트도 늘 하고 있었기에 쉽게 임신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호기롭게 시도를 했는데 쉽지 않았다

첫 번째는 "에이 그렇지 한 번에 되겠어?"

두 번째는 "아 뭐야.... 이번에도 아니네? 이상하네..."

세 번째는 그냥 임테기 한 줄보자마자 눈물이 주르륵

생각보다 간절했던 것인지, 내가 임신이 잘 안되는게 화가났던 것인지 모르겠다



결혼하자마자 서른한살,

나는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 인생계획에는 스물여섯에 결혼해 이듬해에 아이를 출산하고 키우면 비교적 젊은 엄마가 되겠다고 생각했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어린시절 엄마들 사이에서 우리엄마는 꽤 나이있는 엄마였기에 나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자리했다)

서른하나에 임신조차 되지 않았다면 임신, 출산까지 하면 나는 몇 살이지? 이런 생각에 몇 번이나 노력해보았다고 벌써 미래를 걱정하고 불안해 하고 있었다



성격이 급한 B형 여자인 나

뭔가 생각을 하면 바로 실행해야 하는 불도저!

다음날 바로 산부인과로 향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인지 마음의 평화를 주려한 것인지 의사선생님은 “원래 임신율이라는 게 정상적인 부부도 한 번에 성공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에요. 마음부터 좀 내려놓으세요.” 하시기에 믿고 가보자 싶어 그 무거웠던 마음을 툭 내려놓고 선생님이 매번 정해준 날짜에 내원해 난포 크기를 보고 숙제 날짜를 받았다

그 당시 생리주기가 들쑥날쑥이라 임신이 안된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혼자 배란기를 알기 어려우니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그저 날자 맞추기에 집중했다






그러다가 몇 번 실패를 보고, 배란유도제라는 약을 먹으며 난포를 키우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난포가 아주 쑥쑥 잘 자란다고 했다.

‘역시 나는 참 건강한 여성이야!’

나는 스스로 너무 자랑스러웠고 ‘그럼 그렇지! ‘생각하며 곧 임신할거란 자신감으로 숙제받은 날 숙제도 열심히 하고, 행여나 임신일까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후에 그런 조심의 또 조심이 독이 될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걸 그렇게 8번의 주기가 흐르고 임신은 여전히 되지 않은 채로 결혼 후 1년이 지났다


이제는 주변에서 아이 안 갖냐고 물어보거나 , 먼저 아이를 가진 사촌동서 소식을 듣고 부러운데 티도 못 내고 끙끙 앓기도 하고, 결혼 전엔 자주 보지도 않고 살았다는 남편의 친가 외가 식구들을 번갈아 한 달에 한두 번씩 만나게 되며 아이 이야기 나올 때마다 무슨 죄인처럼 할 말이 없어졌다.



3대 독자 장손이랑 결혼은 해가지고  아직 임신도 못했는데 "아들"을 바라는 듯한 그 느낌, 부담가득..

나도 어차피 아이욕심이 있었기에 그럴 때마다 했던 말이 있다

"딸이면 어떻고 아들이면 어때요, 어차피 아들 낳을 때까지 낳을 건데 호호호" 내가 미쳤었나 보다

연이어 그런 일이 있은 후 시어머님께서 내 기분 상하지 않도록 남편과 같이 한약을 먹어보자고 하시며

그냥 건강하라고 먹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라며 약을 지어주셨다

"아기 잘 들어서는 약도 넣어달라고 했어"라는 말씀과 함께였다



그 즈음 사촌동서는 아들을 출산했고, 나는 그때까지도 임신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사실 촌수로 따지면 안보고 사는게 맞는 사이임에도 남편이 고모와 함께 일을 하고 있었고, 같은지역에 살았기에 자주 보는게 스트레스였다.

그 사이 나도 고군분투했다. 쉬고 있지는 않았는데, 차라리 그 당시에 쉬었으면 마음 내려놨으면 아기가 좀 더 일찍 찾아왔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처음 병원 다닐 때 난포 쑥쑥 자란다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는데 그게 "다낭성 난소증후군"이란 말인 줄 알았더라면 바로 치료를 하든, 전원을 하든 했을 것인데, 같은 여자인 선생님한테 얼마나 배신감이 느껴지던지...포도송이처럼 잔뜩 자란 난포들 사이에서 숙제 날짜를 정한들 서로 자라겠다고 아우성인 난포들 중 성숙 난자로 배란이 된 난자가 있었을까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나는 솔직히 남편에게 미안하지만 그에게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흡연, 식습관 때문에 정자수가 적거나 뭐 그런 거 아닐까?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보라며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해서 비뇨기과에 데려갔다.

검사방법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지만 대견하게 검사를 잘해주었고 검사 결과는... 지극히 정상, 우수한 정상이었다.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희비가 엇갈렸다.

'그럼 내가 문제인가?'




그러다가 담당의를 바꾸게 되었는데,

네이버에 검색을 수도 없이 해본 다음 나팔관 조영술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내가 먼저 제안을 했다.

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나팔관 양쪽 폐쇄 진단...

'한쪽도 아니고 꼴랑 두 개 있는 나팔관이 두 개 다 막혔다고?' 그럼 임신 안되는 거 아니냐고 하니 수술하면 된다고 하길래 바로 수술 날짜 잡지 않고 집에 가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시험관 아기를 해볼까?' '수술을 하고 자연임신을 할까?' 그때까지도 시험관이라는 게 생소해서 정말 큰 문제 있는 사람들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고, 자연임신이라는 말에 솔깃해서 수술 날짜를 잡았다



나팔관은 막히고, 유착이 심해서 박리까지 했다고 하시며 곧 임신될 거니 걱정하지 말라는 담당의 말에 너무나 안심이 되어 입원기간 내내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7-8개월 임신소식은 없었다






나는 자기 관리도 잘하고, 아무리 야근, 철야를 해도 화장은 꼭 하고 다녔으며 남들 회사에서 저녁 먹으러 갈 때 요가를 가고, 점심에는 현미밥에 야채 도시락 먹으며 내 나름대로 자기관리를 했던 사람인데...결혼 후  나는 1년 반 만에 나는 11kg 증가했고, 아무리 많이 걷고 운동을 해도 호르몬제 복용하며 찐 살은 빠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지금도 그때 사진을 보면 정말 놀랍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난임 병원을 찾았고, 아이를 만나기 위한 다시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나팔관 조영술을 다시 했지만 한쪽이 다시 막힌 채였고, 한쪽은 유착이 의심된다고 했다.

어차피 내 나팔관은 이미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술을 왜한거지...?



인공수정은 의미가 없어 시험관을 시작했다.

피를 몇 통을 뽑았는지 검사항목이 정말 많았다.

갑상선 기능 저하증 약, 난소 과자극 증후군 방지 약, 자궁내막 두꺼워지게 하는 영양제, 난자질 개선 영양제, 엽산 등 모두 매일매일 챙겨 먹으면서 배에 주사를 하루에 몇 가지씩 맞으며 알람 해두지 않으면 좀처럼 챙겨 먹고 주사 챙기기 힘들 지경이었다.

이번에는 마음을 좀 다르게 먹었다.

희망고문을 하지 말자고.. ‘어차피 처음에 안될거야.’

연습한다고 생각하며 그저 편하게 한단계씩 해야할일들을 할뿐이었다.



난자 채취를 하고 복수가 차서 임신 막달처럼 배가 나와서 외출 조차 할 수 없었지만 난자 개수가 많이 나와서 너무나 행복했다.

결혼한 지 1년 반 만에 행복 기준이 바뀌어 있었다. 참 웃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땐 최선을 다해야 했다.

내가 지금 당장 꼭 해야 하고, 가장 소원하는 일이었기에 웃으며 기분 좋게 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이식을 하고 남편과 둘이 쌍둥이면 어쩌나 하고 걱정도 했다가,’에이 쌍둥이면 너무 좋지.’ 하며 둘을 어떻게 키우냐고 걱정하면서도 한번에 낳으면 두번 고생 안해도 되겠다며 즐거움 상상에 빠졌다.



멘탈이 약한 나는 임테기  줄을 보면 세상이 무너져 내릴  같아서 피검사하는  임테기는 집에 사두지도 않았다.

아주 낮은 수치로 임신 수치가 나왔고, 집에 가자마자 너무 기뻐서 임테기를 해보았다.

옅은 두줄이었지만 분명히  줄이었다.


처음으로 보는  !”


그렇게 수많은 임테기를 이 순간을 위해 버려왔나보다. 너무 감동이었고, 행복했다.

내가 드디어 엄마가 되다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엄마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몰골이 어떻든, 살이 얼마나 쪘든, 그 어떤덧도 나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엄마표 놀이, 유아 심리, 아이 물건, 아이 기념 촬영하는  SNS에서 스크랩하며 태어나면 모두  해줄거라며 아이가 콩알만 해지기도 전에 이미  육아관까지 완벽히 세워두었다.




초음파 보고  날이면 남편과 함께 다리가 엄청 길다, 눈뜬  봤냐 얼마나 예쁘냐며 유난을 떨고,

아이 물건으로 방하나를 가득 채우고 거실까지 차지하기 시작했다.

초음파 보고 오는 날마다 엄마의 간절했던 마음과 행복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임신 일기도 쓰고 편지도 썼다.

세상의 중심에는 오직 나와 아이뿐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크면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 나는 무슨 자신감으로 아이도 쉽게 순풍  낳을 것이고, 모유는 일도 아닐 거라며 분유 먹이는 사람들 이해가  된다고, 아이 울리는 여자들 진짜 엄마도 아니라고.. 이런 어이가 없는 말들을 신랑에게 하며 미래의  육아에 대해 자신했었다.






문제는 아이를 출산하는 일부터였고, 그다음은 조리원이었으며, 집에 와서는 하루에 몇 시간 간신히 잠잘까 말까 였다.


이제는 안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모든 일은 쉽게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 모든 것들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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