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엽미술 May 30. 2021

이삼평, 있을 때 잘 하자.

공주에서 이삼평 찾기


 동양의 하얀 금, 바로 17세기 유럽에서 도자기의 별명이다. 그만큼 유럽에서의 도자기의 인기는 높았고, 이런 상황에서 일본과 독점 무역을 했던 네덜란드는, 도자기 교역을 통해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이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독일 작센의 제후였던 아우구스트 2세는 도자기를 사기 위해 정예 기병 600명을 포함한 군대를 팔아 도자기를 사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유럽을 휩쓴 일본 도자기는 사실 17세기 이전에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1000도 이하의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구운 것을 도기라고 하고,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낸 것을 자기라 하는데, 높은 온도에서 구워낼수록 좋은 품질의 자기가 된다. 즉, 자기를 만드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라 하겠다. 17세기 이전 일본은 자기를 만들지 못하고, 도기 수준에 머물러있었고, 생활용기는 대부분 나무로 만든 목기를 이용했다. 도자기 부분에서는 후진국이었다는 것이다.



마이센 자기

 도자기에 심취했던 독일의 아우구스트 2세는 마이센에서 도자기 개발을 명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중국 도자기를 모방하다가 중국이 혼란기에 들어가자 일본 도자기인 아리타 도자기를 모방하게 된다. 이후에는 연구와 개발을 통해 독자적인 자기를 생산하기에 이른다.


 도자기 전쟁, 임진왜란을 부르는 별칭 중 하나이다. 임진왜란 중에는 많은 도자기 기술자들이 일본에 끌려가게 되는데, 이들은 일본 도자기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이번 주인공인 이삼평 역시, 임진왜란, 특히 2차 침략인 정유재란 당시 조선 도자기 기술에 눈독을 들이던 나베시마 나오시게에 의해 일본에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일본에서 조선 도공들이 받는 대접은 천민으로써 대접받던 조선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일본에서는 도공을 장인으로 대접하여, 일본 사농공상의 '사' 즉, 사무라이와 같은 신분으로 대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삼평은 1616년, 아리타의 이즈미야마에서 백자광을 발견해, 일본에서 최초로 자기 생산에 성공한다. 이후 조선의 도공들은 아리타에 정주하며 이조양식의 도자부터 중국 양식, 백자, 청자 등 다양한 도자기 수법을 잇달아 소화하며 도자기 제조법을 연마해나갔다. 이러한 활발한 도자기 제조법의 연마 역시, 일본인들이 조선 도공들에게 좋은 여건을 제공하려고 하고, 그 대접 역시 조선에서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더더욱 엄청난 시너지를 낸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게 아리타에서 생산된 자기를 '아리타 자기' 혹은 이삼평이 가마를 짓던 이마리의 이름을 따 '이마리 자기'라고 부른다. 이 이마리 자기는 나아가 유럽까지 퍼져 독일의 마이센 자기가 생겨나는 데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이렇게 조선 도공들이 일본에서 활약을 하는데, 과연 조선은 이렇게 끌려간 도공들을 되찾아오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것일까? 왜란이 끝난 후, 사명당이나 이경직 등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을 데려오기 위해 '회답겸쇄환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1만여 명에 가까운 조선인을 데리고 돌아왔으나, 상당수는 일본에 머무르기를 택했다. 사실 그들이 조선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조선 정부가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 도와주는 것까지 보장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 조선에서는 조선 도자기는 찬미했지만, 그를 만드는 도공들은 천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내의 전폭적 지지를 받던 조선 도공들이 조선에 돌아가기를 원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은 현시대의 도자 전공생 역시, 자신이라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할 정도이고 사실은 누구라도 충분히 공감될만한 내용일 것이다. 때문에 이삼평도 일본에 남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삼평의 출신지

 그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출신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실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없기에, 그가 일본에서 사용한 이름 카나가에 산베에(金ヶ江 三兵衛)에서 이를 추측하는데, 이것이 그나마 유력하다고 생각된다. 카나가에가 한 금강을 일본식으로 부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충청도에 흐르는 금강의 한자와 다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추정이다. 사실 삼평이라는 이름도 그의 일본 이름인 '산베에'를 한국어식으로 발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자료의 불충분으로 인하여 그가 다른 지역 출신이라는 반론 역시 존재한다. 그나마 사실인 것은 그가 이씨라는 것 정도일 것이다. 

이는 충남 공주에 위치한 이삼평 추모비인데, 일본 아리타의 주민들의 모금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로 추정하건대, 현재 이삼평의 출신지를 한·일 양국이 충남 공주를 가장 유력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사실 조선에 있을 때의 이삼평에 대한 자료가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당시 도공이 천민으로 취급받던 조선에서, 이삼평 역시 천대를 받던 신분일 텐데, 그랬던 그가 역사적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도자 모자이크를 한 작품도 있었다.

  1990년 10월 처음 이 추모비가 지어질 때에는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에 지어졌었다. 그러나 현재는 공주시 반표면 학봉리에 위치한 이삼평 공원으로 이전했다. 이곳에는 위처럼 철화가 그려진 도자 장식들이 같이 전시가 되어있었다. 또한 작성일 기준으로는 구글이나 네이버의 지도에도 이삼평 추모비가 있는 이 이삼평 공원이 등록되어 있지 않아, 쉽게 찾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그나마 카카오 지도에서 이를 찾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삼평은 공주에서 2020년 10월 이달의 역사인물로 뽑히기도 했다. 이렇듯, 공주에서는 이삼평을 공주의 향토사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공주시 입장에서는, 이렇듯 일본 도자의 신처럼 생각되는 이삼평을 공주 향토사로 편입시키려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태도일 것이다. 

또한 이삼평 공원 옆에서는 이런 것을 찾아볼 수도 있었다. 이는 기존의 비문에서 역사를 왜곡한 부분이 있어 이를 정정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때 정정된 주된 내용을 요약하자면, 기존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라고 있던 내용을 '일본으로 끌려가'로 고쳤다는 것이다.



 이삼평이 공주 출신이라면, 그가 조선에서의 도공이었을 때 일했던 장소 역시 존재했을 것이다. 그가 조선에서 도공 생활을 했던 곳은 과연 어디일까? 그의 출신지로 생각되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이곳에 바로 철회분청 가마터가 있었다.


철회분청

 철화분청과 같은 말로, 철회는 산화철로 문양을 그렸음을 의미하고, 분청은 분장을 한 청자란 뜻이다. 즉, 철회분청이라는 것은 분청을 한 청자에 산화철로 그림을 그린 도자기란 것이다.



이 곳이 바로 공주 학봉리 요지이다. 이곳은 1927년에 일본 학자에 의해 발굴 조사되어 가마의 구조가 확인되었다. 즉,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조사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당시 보호되고 있지 않았고, 지역주민들도 이 가마터에 무심했기에 분청사기를 신봉하는 일본인들이 뒤져도 막을 사람은 없었으리라. 현재는 사적 제 3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실 사적이 되어 세워진 저 돌비가 아니라면 이것이 가마터였는지 알기는 힘든 부분이다. 어쨌든 이삼평이 공주 출신이 맞다면, 이곳에서 그도 철화분청을 만들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특히 당시 조선 초기는 철회분청 제작이 활발했고, 백자가 만들어져도 철화를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이삼평 또한 철화에 능하지 않았을까 예상해보는 것이다.




 다음으로 공주에서 이삼평과 관련된 것을 찾기 위해 간 곳은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에 위치한 계룡산도예마을이었다.바로 관련된 것을 하나 찾아볼 수 있었다.  이삼평을 공주시가 이삼평을 공주 향토사로 합류시키려는 노력의 일부로 보였다.

계룡산도예촌의 상징일까? 철화분청을 모티브로 만든 것으로 보였다.
공주시가 2020년에 도예와 관련된 부분에서 노력을 기울였음이 보였다. 이삼평의 2020년 10월 이달의 인물 선정도 이와 관련이 있을까?
박우진 작가의 철회덤벙분청

계룡산도예촌에 위치한 계룡산도자문화관에서도 이런 작품을 찾을 수 있었다. 이외에도 많은 철화도자 작품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공주 학봉리 요지와 같은 철화분청 가마터가 있는 만큼, 공주에서는 이런 철화분청 작품을 많이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석간주로 불리는 산화철, 즉 일종의 녹물로 그리는 철화의 특성 상, 안료가 물에 닿으면 빠르게 퍼지기 때문에 재빠른 필치로 빠르게 그려내야 한다. 때문에 능숙한 실력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 계룡산도자문화관에서는 수준 높은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삼평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끌려와 에도시대부터 일본의 도공으로 활동한다. 에도시대가 되며 그가 마음을 먹는다면, 조선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사실 그가 조선과 일본에서 받는 대우의 차이를 생각해본다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이후로도 이삼평의 자기는 고 이마리 양식으로써, 이후 일본의 많은 자기들에 계속해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마리자기, 즉 아리타야키는 일반적으로 고이마리, 카키에몬, 나베시마의 세가지 양식으로 구분되어 발전한다.


가키에몬 양식

 아리타 지역의 수출용 도자기를 전문으로 생산하던 가마 중 하나인 가키에몬의 가마 도자 중 백색 몸체에 주로 새나 꽃을 즐겨 그린 섬세하고 정교한 고품질의 도자기를 가리킨다. 즉, 이마리 자기가 더 화려히 채색된 것이다. 이는 1646년, 사카이다 카키에몬이 빨강, 초록, 노랑의 물감으로 무늬를 그리는 적색 채색에 성공하여 일본 최초의 채색자기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런 이삼평은 일본에서는 일본 자기의 시초, 도조로 추앙받으며, 일본에서는 여러 기념비가 세워지는 등 신처럼 떠받들여지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본에서 추앙을 받는 사람이 조선인이었다는 이유로 그를 우리 향토사에 편입시키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실상, 그가 조선에 있을 때의 역사, 즉 조선의 이삼평의 역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즉, 이삼평의 역사의 지분은 일본 쪽의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와서는 이미 너무나 늦어버린 한탄이다. 있을 때 잘해줄 것이지, 떠난 뒤에야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다만, 이제와 우리가 그에게 해줄 것은, 그가 원할지는 몰라도 그에게 고향을 만들어주는 것 정도가 아닐까. 공주시의 이삼평 향토사 편입을 위한 노력은 그런 점에서도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조선에서 도공일 때, 그가 그 실력에 알맞는 대우를 받았다면 과연 어땠을까? 그가 돌아오려고 했을까? 정답을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국내 인재들을 대할 때, 그것이 만약 이삼평을 대하는 조선과 같다면, 그들이 남아있겠는가? 그렇지는 않으리라 예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많은 인재를 잃었을지 모른다. 예를 들면 빅토르 안과 같은 경우도 그러하리라. 그들을 배신자라고 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사회가 구성원에게 걸맞는 대우를 해줄 수 있다면 미래의 이삼평은 돌아오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앞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일 거 같다.

작가의 이전글 카롤링거·오토 왕조, 로마네스크로의 이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