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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아닌, '인간'이 있는 스파이물의 시작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 - 존 르 카레(열린책들)●●●●●●◐○○○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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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가고 갈라져 조각이 되었다가 무로 되었다.




지독히 강한 타격이었다. 머리가 둘로 쪼개지는 것만 같았다. 쓰러지면서 왼쪽 귀에서 따뜻한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는 안 돼, 오, 이런, 다시는 안 돼.' 스마일리가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단지 저 멀리서 자기 몸이 돌처럼 천천히 부서지는 모습만이 그려졌다. 금이 가고 갈라져 조각이 되었다가 무로 되었다. 얼굴을 타고 재 위로 떨어지는 따뜻한 피 그리고 저 멀리서 쇄석기 소리만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저 멀리에서 나는 소리였다.

- p. 84. 차와 연민.





. 냉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의 영국. 한 외무부 직원이 소련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고발당하고 일차 조사를 마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된다. 그를 조사했던 영국 방첩부 소속의 만년 정보관 스마일리는 직원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그의 집에서 그의 아내와 대화를 나눈다. 전쟁 후유증과 그로 인한 오랜 불면증, 남편의 자살로 피폐해져 있었지만 의연함을 잃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감탄과 연민을 느끼던 중 전화가 울린다. "부탁하신 08시 30분 전화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사람이 예약전화를, 그것도 아침 8시 30분에 부탁할까.


. 이런 도입부 사이사이로 조지 스마일리의 간략한 과거 이야기가 섞여들어간다. 1차대전이 끝나고 10여년 정도가 지난 전간기, 독일문학 연구자의 꿈을 품던 스마일리는 시대에 휩쓸려 스파이가 된 채 독일에 파견된다. 비록 원래 그가 가졌던 꿈에서는 멀어졌지만, 독일 청년들을 하나씩 포섭해가면서 그는 스파이 일이 자신의 적성에 더없이 잘 맞는다는 걸 깨닫는다. 작고 느릿하지만 대신 누구보다도 냉철하게 사람을 파악하는 눈이 있고, 관념과 집단심리에 휩쓸리지 않는 지성이 있었으며, 자신의 행동과 표정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의지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메마른 스파이 활동 속에서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별 것 없는 추억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스마일리는 2차대전 기간 동안 유럽을 무대로 조직을 구성하고 성공적으로 첩보활동을 해냈고, 승리가 눈에 보이는 시점에 이르자 은퇴해 가정을 꾸리고 그가 바랐던 제2의 인생을 살고자 했다. 그랬어야 할 터였다.





페넌 부인은 잠시 스마일리를 보더니 돌연 싱긋 웃었다. 스마일리가 부인을 만나고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매력 있는 웃음이었다. 부인의 얼굴이 아이처럼 빛났다.

순간 스마일리는 어린 아이였을 당시 엘자 페넌의 모습을 살짝 볼 수 있었다. 조르주 상드의 '사랑의 요정'에 나오는 호리호리하고 민첩한 말괄량이처럼, 반은 성숙한 여인이고 반은 종알거리기 좋아하고 거짓말하는 소녀. 스마일리는 페넌 부인에게서, 혼자 있기 위해 싸우는 고양이처럼 그럴싸하게 거짓말하는 <10대>의 모습을 보았다. 또한 부인에게서 강제 수용소에서 굶주리고 움츠러든 모습을, 생존을 위해 사정없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 웃음 속에서 순진했던 어린 시절의 빛을, 생존을 위해 싸우던 불굴의 무기를 본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었다.

- p. 53. 파운틴에서 커피를.





. 하지만 직원의 죽음을 조사하면서 스마일리는 이제는 보이지도 않을만큼 멀리 - 나이를 먹고 한직으로 밀려나고, 은퇴와 복귀를 거치고 또 다시 은퇴를 마음먹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 멀어졌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과거가 깨닫지 못한 사이에 자신을 끈질기게 추격해 어느 새 손이 닿는 거리에까지 따라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직원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다. 그리고 그걸 자살이라 말하는 직원의 아내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스마일리가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그때부터 그의 주변에는 심상찮은 이들이 출몰하고, 그들은 가차없이 그를 공격해 들어온다. 결국 그렇게 과거는 그를 따라잡았고, 그는 이제 그들과, 그리고 자신의 과거와 싸워야만 한다. 그게 자신이 뿌린 씨앗이건, 그가 만들어낸 적이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마무리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1961년, 냉전이 완화되었다가 격화되기를 반복하던 시대에 존 르 카레는 '적'이 아닌 '인간'이 등장하는 스파이물을 써낸다. 아직 문장은 투박하고 전개도 매끄럽다고 보기엔 어렵다보니 작가가 몇 번이고 중간에서 이야기를 정리해줘야 하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의 인물들이 영화에 나오는 능수능란한 스파이들과는 달리 총이나 싸움 실력이 아니라 분노에 사로잡혀 익숙하지 않은 서투른 주먹을 날리고 몸을 밀어붙이며 막싸움을 벌이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이야기 내내 왜소하고 굼뜨게 묘사되는 스마일리야 말할 것도 없고,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는지(?) 그의 상대는 장애를 가진 걸로 묘사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투 끝에 겨우 스마일리 역시 뼈마디가 부러지고 곳곳이 멍든 채 고통에 시달리고, 그러면서 자신이 이길 수 있었던 건 오직 '그는 나를 기억해냈지만 나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상처보다 더 저린 아픔을 느낀다. 그렇게 누구도 행복해지지도, 만족하지도 못한 채로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스마일리의 이야기는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스마일리는 취리히로 가는 한밤중 비행기를 탔다. 아름다운 밤이었고, 스마일리는 옆의 작은 창을 통해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배경으로 보이는 회색 날개와 두 세계 사이에 얼핏 보이는 영원을 응시했다. 그 모습에 마음이 누그러지고 공포와 의심이 가라앉았으며 우주에는 불가사의한 목적이 있다는 운명론적 생각이 들었다. 가슴 저미게 사랑을 추구하거나 다시 고독해지는 것 따위는 너무나 사소한 문제 같아 보였다.

곧 프랑스 해안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보고 있는 동안, 스마일리는 자기 아래 있는 정적인 생명을 대신 느끼기 시작했다. 골루아즈 블뢰의 독특한 향, 마늘과 좋은 음식, 선술집에서 흘러나오는 고조된 목소리. 매스턴은 백만 킬로미터 저 멀리에서 무미건조한 서류와 거들먹거리는 정치인들에 갇혀 있었다.

같이 탄 승객들의 눈에는 스마일리가 작고 뚱뚱하며 다소 우울해하다가 돌연 웃고 음료를 주문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다. 스마일리 옆에 앉은 젊은 금발 남자가 곁눈질로 스마일리를 자세히 관찰했다. 남자는 이런 유형의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람은 재미를 좀 보려고 일상에서 빠져나온, 피로에 지친 간부였다. 남자는 심한 메스꺼움을 느꼈다.

- p. 225. 두 세계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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