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2011년) - 강변마을(전경린) 外
1) 흰 깃털 하나 떠도네 - 전경린
냉랭한 방에 방석을 대고 앉아 꽃게탕을 시켰다. 여자는 가방을 뒤적여 검고 동그란 고무줄을 꺼내더니, 축축해진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든 뒤 하나로 모아 느릿느릿 묶었다. 유난히 볼록한 뒤통수의 형태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여자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풀줄기가 베이는 듯한 내음이 났다. 그러자 여자의 머릿속 한 부분이 익은 석류처럼 쩍 벌어지는 듯했다. 그는 여자를 알고 있었다.
기억 속의 여자는 계영과 같은 열한 살이었다. 아이가 이런 여자로 자랐다는 것이 신기했다. 얼굴도 없었던 것처럼, 입술 아래의 점은 물론이고 따로 방황하는 두 눈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낯선 얼굴을 지나 몸의 움직임들을 지나 무엇이 한 인간의 기호가 되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는 알아보았다. 마치 심장으로 본 것처럼. 이상한 감응이었다. 유난히 볼록하게 도드라진 뒤통수가 단서였을까.... 그러고보니, 좀 심한 O자형 다리도 기억났다.
- p. 62.
. 대상작보다 더 좋았던 자선작.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그 유산으로 인생을 바꿔 보겠다는 삶에 찌든 중년남자가 어린 시절에 만났던 "유난히 볼록하게 도드라진 뒤통수를 가진 여자아이'와 나이 들어 재회해 현실과 추억을 오가며 꿈을 꾸는 이야기인 '흰 깃털 하나 떠도네'. 남자는 회상과 고민 끝에 찌들어버린 자신의 인생을 그녀와 함께 바꾸기로 결심하지만, 애초부터 과거에 얽매이지도, 고민하지도 않았던 여자는 남자의 결심을 더없이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린다. 결국 남자는 현실과 추억 어느 하나도 얻지 못한 채 남겨진다. 하지만 어쩌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걸 깨닫는 그걸 우리는 성장이라 부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 속 남자의 찌들어버린 모습이, 고민과 치기가 뒤섞인 채 자신 속에 남아있는지도 몰랐던 순수를 끌어내는 모습이, 하지만 결국 빈 손으로 남겨친 채 '조금만 더 걸으면 (여자가 빼돌린) 그 서류에 하자가 없다는 데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었다'고 중얼거리는 모습 하나하나가 참 좋았다.
2) 막차 - 김숨
죽은 이의 부인한테서 백오십만 원을 받아오던 저녁을, 그녀는 잊을 수가 없다. 상훈이 별 취직자리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그날 저녁 밥상에 올라와 있던 반찬들까지 세세하게 기억했다. 그것이 어제나 오늘 밥상이었던 듯. 그러니까 어제오늘. 돼지고기김치찌개와 어묵볶음, 가늘게 채 썰어 마요네즈로 무친 양배추, 콩나물무침, 멸치액젓으로 간을 한 무생채. 묵묵히 밥을 먹던 남편이 밥상 위로 목을 길게 늘어뜨리더니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콩나물무침과 무생채를 밥과 함께 손가락으로 뒤적뒤적 비비던 참이었다. 무생채 국물을 흥건히 들이붓고서.
"벌을 받게 될 거야." 남편은 그리고 남은 밥을 마저 먹고 밥상을 떠났다.
- p. 160.
. 김숨의 소설을 처음 읽었던 건 이 책에 실린 소설보다 2년 전에 나온 '모일, 저녁'이었는데, 뻔한 상징인 '석쇠 위의 전어대가리'를 가지고 뻔하고 무난하게 이야기를 전개해나갔다. 그럼에도 김숨의 이야기엔 감탄스러울 정도로 사실적이고 그 구질구질함에 몸서리를 치게 만드는 세세함이 있어서 그 때문에라도 끝까지 읽게 된다. 이 단편집에 실린 '막차' 역시도 뻔한 비유가 담긴 뻔한 결말로 끝이 나지만, 중간에 아들이 집을 마련하는 장면이나 옹색한 식사장면들이 소름 돋을 정도로 사실적이고 절실해서 그 장면의 한 줄 한 줄을 읽는 게 너무 좋았다.
3) 해마, 날다 - 윤고은
가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술 취해 토해놓은 말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한다. 자신이 지난 밤에 한 이야기를 요약할 수 없겠느냐고 묻기도 한다. 녹음된 자료나 자신의 신상정보가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내 고객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상담원과 통화를 했던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우리는 고객의 이름을 적지 않는다. 목소리를 기억하지 않는다. 잠시 기억이 머물러도 금세 다른 전화벨이 울리면 당신의 기억 뒤에 또 다른 기억이 덮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분 몇 시간이 쌓이면 돈이 된다. 그게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다.
- p. 224.
. '해마, 날다'라는 제목이 그대로 내용을 말해주는 단편. 퇴근 후 술자리를 끝내고도 누군가에게 토해내고 싶은 것이 응어리져 쌓여 있는 이들과 벌이를 위해 그들이 토해내는 응어리를 받아내는 이들, 그들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 하나의 사무적인 '일'이 된 장면들에선 어딘가 와카타케 나나미의 '당나귀 구덩이'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그렇게까지 날을 세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한결같이 침울하고 맥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각각의 처지를 이야기할 뿐. 그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억지로 끌려나간 회식 다음 날에 읽으면 좀 더 와닿을지도. :) 조금 더 아무말대잔치를 덧붙여보자면, 단편 속의 날아가버린 해마가 전화 속 말소리로 존재하는 것처럼, 날아간 내 해마는 여기에 흰 화면과 까만 글씨로 남아있는 건가(....) 라고 하는 건 고역이었던 회식 후유증에 따른 과몰입인거겠지. (__)
4) 강변마을 - 전경린
아침을 먹은 후 외할머니를 뒤따라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골목들은 깊고 집들도 많았다. 한 사람이 지은 것처럼 비슷비슷한 집들이었다. 집집마다 탱자나무 울타리였고 길가에 키 큰 까마중이 자라고 변소가 대문 앞에 있었고 텃밭이 있었고 구릿빛 얼굴의 사람들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했다. 어떤 집에서는 찐 햇감자를 내놓았고 어떤 집에서는 떡과 사탕을, 어떤 집은 사이다를 내놓았다. 어떤 집에서는 첫 수확한 포도를 내놓았는데, 우리에게 각각 한 송이씩을 주었다. 포도송이마다 크고 탱탱한 포도알들이 서로 밀듯이 비좁게 붙어 있어 떼어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검은 보랏빛 포도껍질을 벗기면 탱탱하고 투명한 녹둣빛 속이 나왔다. 오빠는 즙이 흥건한 포도껍질을 그냥 버렸고 나는 껍질까지 씹다시피 먹었다. 달콤한 즙이 가득한 흑보랏빛 포도도 맛있지만, 끝에 붙은 아주 작은 풋포도도 통째 아삭 씹으면 그 시고 단맛에 정신이 아찔했다. 동생은 입안의 씨를 골라 뱉느라 얼마 먹지도 못하고 끙끙댔다.
- p. 18.
. 간만에 따뜻하고 훈훈한 소설을 읽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정말 이 소설이, 그것도 2011년에 대상이었던 건가 싶었던 전경린의 '강변마을'. 한국소설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후로 이런저런 수상작품집을 접했는데, 그 속에서 이 소설은 유독 어떤 상징도 기법도 소화하기 어려운 주제의식도 없이 언젠가 겪었을 법한 어린 날 시골 할머니 집의 풍경과 그 속에서 근원적인 따뜻함을 접하고 풍경 속에 녹아드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나 역시도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하얗게 내리쬐는 시골 할머니 댁의 햇빛과 길에서 뽀얗게 올라오는 흙먼지, 탱탱한 포도알을 알고 있는 세대이기에 더 좋았고. 모두가 변화와 기법과 주제의식을 이야기할 때, 하나 정도는 이렇게 우직하고 따뜻한 이야기가 있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 - 권여선
. 안부를 묻다 - 김미월
. 물의 무덤 - 김태용
. 증오의 기원 - 손홍규
. 싱크로나이즈드 - 하재영
. 이미, 어디 - 이승우
. 달똥과 요산 - 박성원
버스에서 내렸을 때 굉장한 뜨거움이 훅 끼쳐왔다. 당황하는 사이 버스는 먼지를 일으키며 떠나버리고 길은 텅 비었다.
"여기서부터 5리를 걸어가야 해."
우리를 데려간 아저씨가 들판 길로 접어들며 말했다. 발을 디딘 길 위에 타닥타닥 불꽃이 타듯 모래와 사금파리들이 반짝거렸다. 하늘과 해와 길이 모두 백광 속에서 타오르는 것 같았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길이 벼가 자라는 들판 가운데로 죽 뻗어 있었다. 아저씨가 걷기 시작했기 때문에 오빠와 나와 동생도 따라 걸었다.
얼마 못 가 머리 위쪽 정수리가 잉걸불을 인 듯 뜨거워졌다. 햇볕이 짧은 칼날처럼 어깨에 파고들어 살을 가르는 듯했다. 5리에 대한 거리 인식도 사라지고 시간감각도 사라졌다. 신기루처럼 흰 불꽃이 일렁이는 백광 속을 부유하듯 걷고 또 걸어갔다. 마녀가 불을 때는 솥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 p.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