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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혁명은 일어날 수 있을 뿐, 성공할 수 없다

혁명가(역사의 전복자들) - 에릭 홉스봄(길)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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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과 봉기에 적합한 이상적인 도시를 건설한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전쟁이 시작된 처음 며칠 동안의 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피레네 산맥의 도시 푸이세르다는 작은 혁명 공화국이었고, 자유로운 갑남을녀, 총, 한없는 토론으로 가득했다. 트럭들이 광장에 세워져 있었다. 전쟁을 위한 것이었다. 아라곤 전선으로 싸우러 가고 싶은 사람들은 트럭으로 갔다. 가득 차면 트럭은 전선으로 달려갔다. 돌아오고 싶은 자들은 돌아왔을 것이다. "멋있긴 한데 전쟁은 그런 게 아니다"라는 말이 이런 상황에 들어맞는다. 당시에는 경이로웠지만, 이런 경험의 영향으로 나는 스페인의 아나키즘이 비극적인 소극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받아들이는데 20년이나 걸렸다.

- p. 124. 아나키즘에 대한 성찰.





. 예전에 에릭 홉스봄의 '파열의 시대'를 읽고 리뷰를 썼을 때 1917년에 태어나 2012년에 95세의 나이로 타계한 홉스봄의 이력을 소개하면서 "역사학자는 건강하게 오래 살면 그것만으로도 승리자가 되는 느낌이 있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확신이 더욱 깊어진다. 68혁명의 진행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그 때 프랑스 공산당이 이러저러하게 했으면 달라졌을거라고 아쉬워하는 정도야 그럴 수 있다치더라도, 무려 스페인 내전을(조지 오웰이 참전한 그 스페인 내전 맞다!) 보러가서 '거기 있는 아나키스트들 뜻은 좋았는데 분위기가 너무 느슨하긴 하더라' 하는 건 대체(....) 하기야 왜 공산주의자를 선택했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유대인인 자신으로선 세계대공황(응?)으로 자본주의가 휘청거리고 그 대안으로 히틀러가 집권하는 걸 '목격하고'(??!!!!) 절망해서 공산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회고부터가 일단 반박이 불가능하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복창하라고 배운 것이 단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레닌이 발전시킨 마르크스주의, 소련의 스탈린 치하에서 단순화되고 때로는 왜곡된 얼어붙은 마르크스주의라는 걸 깨달았다. '마르크스주의'는 완성된 이론과 발견물의 집합체가 아니라 발전 과정에 있는 사상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의 사상도 그가 살아있는 동안 꾸준히 발전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의심할 바 없이 잠재적인 해답을 갖고 있지만, 대부분 우리가 직면하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해답은 아니다. 부분적으로는 마르크스와 레닌 이후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그들 가운데 아무도 자신들의 시대에 존재한,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어떤 문제들에 관해서는 실제로 얘기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 p. 163.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대화.





. 이 책은 그런 홉스봄이 조교수로 있던 4-50대 시절에 공산주의와 혁명에 대한 여러 논의에 참여하여 주장했던 의견들을 한데 묶은 책이다. 평생 공산주의자였던 홉스봄답게 스탈린주의로 교조화 되어버린 공산주의의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공산주의만이 가질 수 있는 조직력과 행동력을 옹호하기도 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조지 오웰로 대표되는 영국 내 아나키즘 찬동자들에 맞서 아나키즘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여러 사상가의 주장에 대해 비평을 하는데, 사실 이 부분은 배경지식 없이 읽기는 영 버겁다. 그나마 아나키즘에 대한 부분도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와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을 읽고 넘어왔으니 아 이게 그 시대의 이야기고 조지 오웰과 대척점에 있는 이야기구나 하는거지, 마냥 읽기엔 좀 어려울 것이다. 다행히 전반부를 어찌저찌 넘어가면 게릴라와 쿠데타, 혁명과 봉기, 68혁명과 미래의 혁명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그 중에서도 마지막 100여쪽은 극히 현실적인 시각에서 20세기와 그 이후의 선진사회에서 혁명이 성공할 수 있을지를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어나갈 수 있다.





폭동과 봉기에 적합한 이상적인 도시를 건설한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은 어떤 모양일까. 그런 도시는 인구밀도가 높아야 하고 너무 크지 않아야 한다. 본질적으로 걸어서 구석구석 다닐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자동차가 필수품인 사회에서 더 큰 봉기가 일어난다면 이런 판단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넓은 강으로 분할되지도 않아야 한다. 이는 경찰이 쉽게 장악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남부 런던이나 파리 좌안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강의 양쪽 기슭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를 외면한다는 점은 지리학이나 사회심리학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시 빈민에게는 사회적으로든 인종적으로든 상대적인 동질성이 있어야 한다. (중략) 또한 도시는 구심점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도시의 다양한 부분들이 자연스럽게 도시의 중심 제도들을 지향해야 한다. 중앙집중화될 수록 더 좋다.

- p. 291. 도시와 봉기.





. 특히 도시 설계의 측면에서 폭동과 봉기에 적합한 이상적인 요건을 하나하나 제시하는 '도시와 봉기' 편은 그 중에서도 압권. '인구밀도가 높아야 하고 너무 크지 않아야 하고 걸어서 구석구석 다닐 수 있어야 하며 넓은 강으로 분할되어선 안되고 빈민들 간에 동질성이 있어야 하고 중심핵을 통해 집권화되어 있어야 한다'는 부분에 이르면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연히 서울은 어떤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고보면 나라를 뒤흔든 대규모 시위 때도 한강 이북과 이남의 온도차는 상당히 컸고, 도심을 대학들이 반원형으로 에워싸는 서울의 도시구조는 시위에 최적화된 구조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래서 서울대가 관악으로 가게 된 것이었을까. :)





오히려 민중운동이 함의하거나 제기하는 사회 비판의 근원성 때문에 구체적인 목표는 설정될 수 없었다. 적은 바로 '체제'였다. 투렌을 인용하자면, "적은 더 이상 군주나 부르주아지 같은 인격적인 사회적 범주가 아니었다. 적은 탈인격화, 합리화, 관료화된 사회경제적 권력의 행위양식의 총체였다." 적은 사물이나 제도가 아닌, 인간관계 프로그램이나 탈인격화 과정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즉 착취자를 함축하는 착취가 아니라 소외였다. 단적으로 (별로 혁명적이지 않은 노동자들과 달리) 학생들은 진정한 사회 변혁이 드골주의라는 순전히 정치적인 현상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한 드골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를테면 민중운동은 별로 정치적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반정치적이기까지 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운동의 역사적 중요성이나 영향력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단기적 관점에서 이는 치명적이었다. 투렌이 지적하듯이 1968년 5월은 혁명사에서 파리 코뮌만큼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오늘날 서유럽에서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p. 315. 1968년 5월.





. 이와 함께 바다 건너편에서 무섭게 타오르다 허무하게 사그라든 68혁명을 지켜보면서, 이제 선진 산업사회에서 "혁명은 일어날 수는 있겠지만 성공할 수는 없다"고 선언하는 혜안도 놀랍다. 학생에 일반시민들까지 가세해 어마어마한 기세로 일어난 68혁명이었지만 정작 공산당을 포함한 기성 좌파 정당은 어떤 역량도 발휘하지 못한 채 더없이 무력했고, 누구나 이제 혁명의 성공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드골은 혁명을 막아냈다. 물론 드골의 정치적 기술이 극에 달한 것도 있었지만, 홉스봄은 그 근본적인 이유를 학생들과 일반인들의 적은 드골이나 집권층이 아닌 탈인간화와 합리성, 관료제로 대표되는 '체제'이며 그로 인한 '소외'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들은 각성과 개선을 주장하면서도 혁명에 수반되는 붕괴와 혼란을 감당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체제에 편입된 좌파 정당 역시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혁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시대를 겪은 하루키가 말한 것처럼, "이제는 누구도 누구에게 돌을 던져야 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결국 시위의 불길이 얼마나 크든, 선진세계에서 그 끝은 극단주의와 개량주의의 분열일 수밖에 없다는 홉스봄의 예측은 이후 수십년 간 적중했고, 지금도 유효하다. 그렇게 혁명의 실현가능성을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연구했던 장년의 학자는, 90이 넘은 노학자가 되어 선진세계에서 혁명이 성공할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이 입증되는 것을 더없이 씁쓸하게 지켜봤으리라.





유대인인 청년 지식인이 이런 환경에서 어떤 인물이 될 수 있었겠는가? 붕괴한 것이 정확히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하여) 자유주의 세계였기 때문에 여하튼 자유주의자는 아니었다. 다른 유대인들처럼 우리는 원칙적으로 신념을 드러내면서 정당을 지지할 수 없었다. 유대인을 배제하는 민족주의를 따를 수도 없었고 반유대주의자를 따를 수도 없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에 근접하기도 했으며, 혈통과 영토에 기초한 민족주의를 선택할 경우에는 시오니스트가 되었다. 그러나 청년 지식인 시오니스트들도 대부분 자신들을 일종의 혁명적인 마르크스적 민족주의자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부르주아 사회와 자본주의는 분명히 다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대항하는 데 헌신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부재하는 미래가 아니라 어떤 미래를 쉽게 선택했고, 그 의미는 혁명이었다.

- p. 327. 지식인과 계급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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