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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엘러리 퀸, '탐정' 엘러리 퀸이 되다

그리스 관의 비밀 - 엘러리 퀸(시공사)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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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고 있소. 그 제3의 인물이 바로 나니까."




"그 가설은 잘못된 거요. 거기에는 제3의 인물이 있었소. 그러니까 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다는 말이지. 이건 추측이 아니라 증명이 가능한 얘기요."

"어떻게요?"

엘러리의 머리가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어떻게 말입니까? 제3의 인물이 있었습니까? 증명할 수 있다고요? 어떻게 아십니까?"

녹스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알고 있소. 그 제3의 인물이 바로 나니까."

- p. 202. 미궁.




. 엘러리 퀸의 데뷔작인 '로마 모자 미스테리'부터 네 번째 작품인 '그리스 관의 비밀'까지 왔는데, 시리즈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트릭은 점점 복잡해지고 이야기는 점점 꼬여가고 있다. 초기작인 로마 모자 미스테리나 '프랑스 파우더의 비밀' 때까지만 해도 꼼꼼하게 읽어나가기만 하면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것과는 별개로 범인을 짐작하는 정도는 가능했고, '네덜란드 구두의 비밀' 때는 비록 동기가 가려져 있을 지언정 범인이 누구인지는 확실했던 데 비해, 이 소설만큼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도 범인의 윤곽조차 잡히지 않는다. 작가 엘러리 퀸은 이쯤에서 한 번 추리 난도를 올려서 매니악한 독자들과 승부를 걸어봐야겠다고 생각이라도 한 듯 진상에 다다르기까지 수십 명의 등장인물과 몇 개의 사건들을 겹겹히 포진시키고, 탐정 퀸은 추리를 내놓았다가 번복하기를 반복하며, 그렇게 급경사를 네 발로 기어가듯이 읽은 끝에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 밝혀지는 범인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다. 와. 쉽지 않다.


. 이야기는 부유하고 명성 높은 미술품 상인 칼키스의 장례식에서부터 시작된다. 장례식이 끝나고 유언장이 사라졌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경찰과 검찰이 사건 현장을 조사하고, 아직은 탐정이 아니었던 '청년' 엘러리 퀸이 아버지 퀸 경감의 빽으로 사건에 참여한다(이 책은 출간순서로는 네 번째지만, 시간 순서로는 첫 번째 작품이다). 퀸은 특유의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유언장이 칼키스가 묻혀있는 관에 들어있을거라 추리하지만, 관 속에서는 유언장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시체가 발견된다. 장례식이 벌어지고 수사가 시작되는 동안의 짧은 틈에, 누군가가 관을 열고 그 안에 시체를 넣은 것이다. 과연 시체는 누구일까. 그는 왜 죽었을까. 왜 관에 밀어넣어진 것일까.




두 명의 일꾼들은 나사를 돌려 뚜껑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바로 이 긴장된 순간에 5번 애비뉴에서 수많은 차들이 불협화음의 경적을 울리기 시작했다. 이 순간에 일어난 사건의 기묘함을 생각하면, 그 시간에 울린 경적 소리는 참으로 섬뜩한 일이었다. 드디어 뚜껑이 열렸다.

그리고 곧 도저히 믿기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났고, 사람들은 악취의 진원지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방부 처리를 해서 딱딱하게 굳어진 캘키스의 시체 위에, 피멍이 들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데다가 썩어가는 살이 다 드러난 또 하나의 시체가 있었던 것이다. 그 남자의 시체는 누군가가 억지로 쑤셔넣은 흔적이 역력했다. 두 번째의 시체였다.

- p. 69. 발굴.





. 하지만 작가는 독자들이 사건을 느긋하게 곱씹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곧이어 칼키스에게 장물인 미술품을 받았다는 대부호 제임스 녹스가 등장하고, 시체의 신원이 밝혀지며, 살해된 이가 죽기 전에 만났던 인물들에 대한 조사가 이어지고, 또 다른 범죄가 발생한다. 이 부분의 줄거리는 상당히 길고 복잡한데다, 중간중간 친절하게 사건의 경과를 정리해주던 이전 소설들과는 달리 이번 소설에선 이야기 중반까지도 힌트라고 할만한 게 거의 없다. 오히려 탐정 퀸이 몇 번이나 잘못된 추리를 거듭하며 그렇잖아도 사건을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운 독자를 더 혼란스럽게 한다. 오죽하면 작가 퀸이 언제나 하는 '독자에의 도전'을 통해 이 사건이 지금까지 발표한 사건들 중 가장 난해하다고 할 정도고, 탐정 퀸 역시도 진상을 설명하면서 자신 역시도 막판의 막판에 가서 범인이 저지른 욕심 때문에 사건을 추리할 수 있었을 뿐이라고 얘기할 정도니까. 그의 책을 거의 다 읽어가는 지금에 와서도 엘러리 퀸 시리즈 중에선 이 작품의 추리가 가장 복잡하다고 생각되는데, 과연 어떨까. 추리소설이나 추리만화를 읽으면서 나도 좀 감이 있는 것 같은데 했던 독자가 있다면, 이 소설을 통해 스스로를 제대로 한 번 테스트해보는 게. :)





"엘러리, 그 생각은 잊어버려라. 세상이 끝난 건 아니니까. 추리가 실패할 수도 있지 뭘 그러냐? 잊어버리라니까."

엘러리는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잊어버리라고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겁니다. 아버지."

엘러리는 주먹 쥔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사건을 통해서 저는 한 가지 배운 게 있습니다. 제 머리통을 날리는 한이 있어도 앞으로 이 원칙만은 꼭 지킬 겁니다.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남아 있고,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완벽한 시나리오를 갖고 있지 않는 한은 절대로 결론을 내리지 않겠다는 겁니다."

- p. 228.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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