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십자가의 비밀 - 엘러리 퀸(시공사) ●●●●●●●◐○○
"'타우' 혹은 T 십자가에는 다른 이름이 또 있습니다."
그는 잠시 멈췄다가 조용히 말을 끝맺었다.
"때로는 '이집트' 십자가라고도 하죠!"
문 반대쪽 벽의 거칠게 깎은 통나무 위에 마치 트로피처럼 남자의 시체가 한데 못박혀 있었다. 시체에는 머리가 없었다. 두 다리는 한데 포개져 못박혀 있었다. 입고 있는 피로 얼룩진 누더기를 보아하니 - 가짜 산사람의 누더기옷 - 가엾은 교장의 시체였다. 피가 돌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피는 벽에도 뿌려져 있었다. 아이셤이 지난번에 왔을 때 그처럼 깔끔하고 아늑했던 오두막이 지금은 마치 도살장 같았다. 풀로 엮은 매트는 시뻘건 점으로 두텁게 얼룩져 있었다. 바닥에는 시뻘건 줄과 얼룩이 여기저기 있었다. 튼튼하게 생긴 낡은 상판은 원래 놓여져 있던 물건들이 싹 쓸려버리고 대신 칠판으로 사용되었다. 그 칠판 위에는 피로 커다랗게 크로삭의 복수의 상징이 씌여져 있었다. 대문자 T가.
- p. 391. 두 번 죽다.
. 그 동안 순서대로 읽어왔던 엘러리 퀸의 소설들을 되짚어보면 각각의 작품마다 확실한 컨셉을 가지고 글을 써왔다는 걸 알 수 있다. 데뷔작인 '로마 모자의 비밀'에서는 어떤 것보다도 논리를 최우선으로 두겠다고 선언하면서 '독자에의 도전'이라는 이벤트를 선보이고, 뒤이은 '프랑스 파우더의 비밀'에서는 극적인 도입부와 반전을, '네덜란드 구두의 비밀'에서는 (결과는 신통치 않았지만) 조금 더 업그레이드 된 복잡한 추리를, 그리고 '그리스 관의 비밀'에서는 시간을 앞으로 돌려 탐정 엘러리 퀸의 프리퀄이라고 할법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전작의 실패를 만회하겠다는 듯 트릭의 난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끌어올렸다.
. 이번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은 그런 엘러리 퀸이 작심하고 '보여주기'에 나섰을 때 얼마나 화려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첫 장면부터 목이 잘리고 팔을 벌린 채 높은 곳에 묶여 T자 형태로 남겨진 처참한 시체와 이어지는 피바다가 된 참혹한 현장에 대한 묘사는 마치 슬래터 무비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이 소설이 나온 지 100여년이 지났지만, '웬만큼 수준이 되는' 추리소설 중에서 이보다 더 광기어린 범죄현장은 없지 않을까. 거기에 괴상한 고대 종교가 등장하고, 바다 건너편 외딴 지역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한 수십년에 걸친 복수의 역사가 펼쳐지며, 마지막은 비행기와 자동차와 철도가 몽땅 동원되어 미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추격전으로 끝을 맺는다. 흔히 이런 류의 소설을 읽으면 '영화화되면 얼마나 멋질까'하는 생각이 드는 게 보통인데, 이 소설은 이를 넘어 '영화화를 하지 않아도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도로표지판은 전에는 흰색이었지만 지금은 더럽게 때가 타 회색이 된데다 말라붙은 진흙으로 얼룩져 있었다. 높이는 2미터 정도였고(꼭대기가 엘러리의 머리와 높이가 같았다) 가로대는 튼튼하고 길었다. 엘러리가 몇 피트 떨어진 곳으로 물러서서 보니 그 표지판은 마치 거대한 T자처럼 보였다. 그는 그제서야 유나이티드 프레스 통신의 기자가 왜 이 사건을 'T 살인사건'이라고 이름을 붙였는지 알 수 있었다. 우선 이 표지판이 T자 모양이었고, 이 표지판이 서 있는 교차로가 T자 모양인데다가 살해당한 사람의 집 현관문에도 T자가 피로 휘갈겨 씌여져 있었다. 교차로에서 몇백 피트 떨어져 있는 그 집을 엘러리는 아까 차로 지나쳤었다.
- p. 15. 크리스마스의 살인.
. 거기다 엘러리 퀸의 작품답게 자극적인 장면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 뒤에서는 빈틈없는 추리를 완성시키고 있다. 목이 잘린 시체들과 피범벅이 된 현장,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인물들 사이에서도 탐정 엘러리 퀸은 '왜 굳이' 범인이 이렇게까지 괴상하고 참혹한 현장을 만들어야 했는지를 놓치지 않고 현장에서 발견된 단서들을 하나하나 침착하게 조합해나간다. 흑이 일방적으로 이기고 있는 체커판과 상표가 붙어있지 않은 요오드팅크 병을 통해 범인의 모습이 떠오르고, 이를 통해 온통 광기로 가득했던 것 같은 사건은 반대로 지극히 냉정한 계획범죄였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공정한' 독자에의 도전과 이어지는 대추격전. 비록 그 와중에도 동기가 부실하거나 하는 등의 이런저런 단점이 엿보이긴 하지만, 그런 걸 모두 상쇄할 정도로 멋지다. 멋진 소설이다. :)
그것은 역사적인 수요일로, 네 개의 주에 걸친 역사상 가장 이상하고 조마조마한 범인 추적이 시작된 날이었다. 그 추적은 9백 킬로미터나 되는 갈짓자형의 지역에 걸쳐 펼쳐졌다. 거기에는 현대적인 교통수단이 모두 동원되었다 - 자동차, 급행열차, 그리고 비행기 등등. 애당초는 다섯 사람이 참가했는데, 여섯 번째 사람이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 추적은 엘러리가 오하이오의 스튜벤빌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9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 그것은 추적을 주도한 사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마치 9세기나 되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 p. 397. 대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