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아버지는 한이 너무 많으셨다.
삶이 고단했고, 몰라서 전하지 못했고,
그래서 기억조차 붙잡을 수 없었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여섯 살 큰할아버지와 두 살 어린 우리 할아버지는
부모를 잃은 고아로 남아 머슴살이를 해야 했다.
그 고단한 세월 속에서도 큰할아버지는 희망을 잃지 않고
가정을 일구셨다.
하지만 고단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큰할머니는 아이를 낳다 세상을 떠나셨고,
자식을 품에 안아보지도 못한 슬픔,
사랑하는 아내마저 잃어야 했던 고통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큰할아버지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떠나셨다.
우리 할아버지는 세상을 향해 원망스레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식들이 곁에 있었기에 그마저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 한을 삼키기 위해 마셨던 술,
그 술기운 속에서 종종 하늘을 향해 가슴의 한을 토하셨다.
6.25 전쟁 통에 북에서 내려오신 할머니는 뼈에 사무친 가족의 그리움을
알기에 할아버지를 이해하셨다.
그렇게 할머니는 온몸으로 집안을 떠받치셨다.
하지만 아버지와 고모들에게 할아버지의 울부짖음은 두려움으로 남았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담벼락 너머로 몰래 지켜본 장면을 평생 마음속에 지니고 살았고,
그 기억을 조심스럽게 내게 전해 주셨다.
달빛조차 숨은 고요한 밤.
술에 취한 할아버지는 누렇게 바랜 문서 다발을 들고 나와
담벼락 아래로 내던졌다.
종이를 찢는 소리, 술기운 섞인 울부짖음,
곧이어 치솟은 불길.
그 모든 것이 한 장면에 뒤엉켜 있었다.
“이놈의 인생… 아버지… 형님… 대체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그 외침은 울음인지 분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불길은 삽시간에 종이를 삼켜버렸고,
붓글씨로 눌러쓴 이름과 문장들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때 불타 없어진 문서가 무엇이었는지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어린 아버지는 무언가 불타는 그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른 뒤, 아버지는 알게 되셨다.
그 불길 속에서 사라진 것이 바로 사발통문, 그리고 동학과 관련된 문서들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이미 모든 자료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아버지는 그날 이후 할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셨다.
그리고 집안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라 믿으셨다.
죽을 각오로 학업에 매달리셨고,
마침내 교단에 서는 선생님이 되셨다.
우리 가족은 이렇게 이어져 왔다.
기억은 세대를 넘어 내게로 흘러들었다.
어느 날, 증조할아버지의 이름과 행적이 역사 속에
단 한 줄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슴이 저려온다.
우리 증조할아버지의 이름과 행적은,
자신의 삶조차 후손에게 알리지 못한 채 사라져 간
수많은 분들의 희생 위에 남겨진 이름과 행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들을 잊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