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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 없는 세월

by 이해하나

6·25 전쟁 통에 남쪽으로 내려오신 할머니는 살아남기 위해 죽음 앞에서도 소리조차 낼수도 없었다.

두려움에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고, 무섭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살아 남기 위해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잃어버리신 분이었다.


국민학교조차 졸업시키지 못한 채 세 딸들을 공장으로 내보내야 했던 할머니는, 젖 한 번 물리지 못한 채 먼저 떠나보낸 두 아이의 기억까지 품고 살아야 했다. 매일 날 선 칼이 마음을 도려 냈다. 그 상처는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깊었고, 더욱더 이를 악 물게 만들었다. 그렇게 아들 하나를 공부시켜 선생님으로 만들고, 억척같이 남은 네 딸들을 키워내셨다.


그러나 세월은 또다시 잔인하게, 그 첫째 딸을 먼저 데려갔다. 그날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는 법조차 잊은 얼굴로 하늘을 오래 바라보셨다.


그렇게 표정 없이 살아가셨다. 기쁨도, 슬픔도 이제는 얼굴에 머물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일로 세월을 견디셨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고되고 한 많은 세월을 함께 버텨온 할아버지마저 지게를 지고 오시다 길 위에서 쓰러지셨고, 그 길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셨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혼자가 되셨다. 작고 허름한 집 안에는 바람 소리와 시계 초침 소리만이 남았다. 낡은 상 위에는 늘 반찬 두어 가지와 식은 밥 한 그릇이 놓여 있었고, 불 꺼진 부엌에는 할머니의 그림자만이 길게 드리워졌다. 그 후로도 할머니는 매일같이 일을 하셨다.


그리고 어느 해 겨울, 논에 일을 하러 가시던 할머니를 과속하던 버스가 치었다. 응급차 안에서 나는 “할머니..... 할머니.....” 하며 울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그때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꼭 잡아 주셨다. 그렇게 할머니는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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