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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후은성 Sep 30. 2021

회고록

그때의 나는 그때의 너를 뜨겁게 사랑했지만.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열었는데 하드 디스크를 뒤적거리다 보니 너와 함께 찍었던 사진과 동영상이 나왔어. 오랜만에 그때의 우리가 그리워져서 그것들을 한 장 한 장 유심히 봤지. 내가 잊고 있었던 나와 너의 청춘을 들여다보는 것일 뿐인데, 기분이 이상했어. 그때는 몰랐는데, 영상 속 우리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더라. 서로를 향한 애정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고, 애칭을 쓰는 우리가 너무 이뻐 보였어. 정작 난 너 이후로 만난 애인들에겐 애칭을 써본 적이 없는데. 그래서인지 애칭으로 누군가를 부르는 내가, 나는 어색했어. 미안해, 너무 솔직하지. 그때의 사진들과 동영상들을 보는데 술이 고파서 마셨어. 그러니까 이건, 취중진담이야.


다른 이들을 향한 회고록은 에세이로서 나름 남겼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너를 향한 글은 남긴 적이 없더라. 너를 주제로 글을 쓰기엔 우리 사이를 너무 많은 이들이 알고 있기도 하고, 만남부터 헤어짐까지 나의 진심을 전부 쏟아부은 이가 너라서, 유명한 가수의 노래 속 가사와 같이 내가 느낀 감정을 증폭시키다 못해 폭발시켜 기록하는 수필 속에 등장시키기가 어려웠는데, 이제는 너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될 것 같아. 요즘의 난 그때의 우리를 떠올리는 것에 무뎌졌거든.


내가 널 뒤돌아보지 않게 됐다고 해서 너를 주제로 글을 써 내려가는 게 예의가 아니긴 한데 이해를 바라.

너는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예술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작품에 담곤 해. 근데 알다시피 내 삶의 큰 파이를 차지하는 이가 너라서, 이제는 너를 언급하지 않고 글을 쓰기란 어려울 것 같아.


생각해보면 넌 내가 만나고 싶지 않았던 조건들을 전부 가지고 있었어. 그런 너의 고백을 받아들인 건, 적당한 마음이었을지도 몰라. 나는 꽤 오랜 시간 솔로였고, 연애가 하고 싶었거든. 이런 마음으로 너의 연인이 되었다고 할 지라도, 난 너에게 최선을 다했지. 기억나? 사귀기 초반에 네가 유독 바빠서 집안일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 같길래 내가 너의 하우스메이트의 협조를 받아 네 방 청소를 하고 옷장 속에 숨어 있었던 거. 그게 100일쯤이었나, 그랬을 거야. 겨울 방학에 나는 친구와 함께 유럽 여행을 가기로 했고, 처음으로 꽤 오랜 시간 떨어져서 지내야 해서 그 사실을 섭섭해했던 너에게 했던 서프라이즈였지.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3주 떨어져 있었는데, 내가 여행 도중 잠시 시간이 나서 네가 살고 있는 곳으로 밤새 기차로 이동해 널 두 시간 보고 또다시 그 긴 시간을 기차 타고 돌아갔어.


웃겼던 것도 생각난다. 클럽에서 핼러윈 파티를 크게 했고 그때는 우리가 비밀 연애 중이었어서 나는 너 신경 안 쓰고 미친 듯이 놀고 있었는데, 네가 날 시선으로 계속 따라다녀서 눈치 빠른 이가 우리 사이가 뭔지 궁금해했지. 네 시선이 그렇게 불탔다고 하더라. 나중에 전해 듣고 네가 너무 귀여워서 박장대소하며 웃었어.


우리가 동유럽 여행했을 때는 어땠고. 2주 동안 떠돌아다녔던 동유럽 3개국 중 크로아티아가 가장 더웠고, 습했지. 유명한 장소들은 딱히 기억 안 나는데, 특별하지 않은 일상적인 것들이 생각나. 스플릿트 숙소가 지하에 있었는데, 습한 환경 때문인지 빨래에서 꿉꿉한 냄새가 나서 숙소 앞에 있던 주차장 조그마한 공간에 빨래 건조대를 가지고 가 널어놨던 거. 그랬더니 더운 날씨 덕에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바싹 말라 그것들로부터 나던 햇살 냄새가 좋았지. 옷에서 나던 포근한 냄새에 우리는 마주 보며 웃었어. 또, 더운 날씨에 걷기 조차 벅차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숙소 근처 공원을 산책했는데, 너무 어두워져서 둘 다 무서워하면서 숙소로 돌아왔잖아.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했어서 이렇게 소소한 것부터 하나하나 기록하자면 글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너와 나의 추억들이 그 긴 시간, 그 아름다운 곳들에 촘촘히 새겨져 있어서 너와 헤어진 이후에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유럽이 곧 너였어. 그래서 유럽과 관련된 예능은 보기가 어려웠지. 너와 함께 그곳들을 손 잡고 거닐었던 것들이 생각났으니까.


너에 대해 나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어.


「 나는 이렇게 춥고 눈이 내리는 날, 네가 떠오른다. 내가 영국에 있고 네가 서울에 있을 때도 그러했다.

우리가 서로를 의지했던 곳 또한 지금의 서울처럼 이렇게 칼바람이 쌩쌩 불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씨가 상당히 괴팍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함께 길을 걸으며 "What the hell is it?"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길을 걸었고, 날씨로부터 느끼는 황망함에 우리는 길거리에서 어이없는 웃음을 짓다가 추위에 부들부들 떠는 서로의 모습이 웃겨 마주 보며 깔깔깔깔, 웃곤 했었다.


모든 유학 생활이 그러하듯, 해외에서 이등시민도 아닌 삼등 시민으로서 살다가 서러운 상황을 마주할 때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했다. 그렇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작고 위태롭게 보이기만 했던 너는, 꽤나 단단한 사람으로 성장해 있었고 나 또한 그 성장폭을 조금이나마 따라가며 너의 흔적을 느꼈다.


우리는 그런 사이었다.

서로의 흘러간 시간의 증명이 되어주기도, 삶을 채워주기도 하였다.」


이랬던 너와 왜 이별을 결정하겠다고 마음먹었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이제는 잘 모르겠네.

어쩌면 딱 한 가지 이유로 헤어진건 아닌 것 같지만, 장거리 연애를 했던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 균열이 일어난 게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아. 너와 지구 끝과 끝에서 연애를 하던 시간 동안 내 마음은 이미 회복이 불가능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널 그냥 놓긴 싫어서 많이 노력했어. 근데,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 이렇게까지 노력하는 게 의미가 있나. 생각해보면 넌 날 위해 포기한 게 하나도 없었잖아. 내가 1년만 나를 위해 양보해달라고 애원했는데, 너는 네 미래에 내가 없는 것처럼 굴었어. 그러면서 넌 나에게 2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려달라고 했지. 그게 시발점이었는지, 어느 순간 너에 대한 모든 게 꼴 보기 싫었어. 네가 나에게 순도 100%의 감정을 드러냈던 것들도 포함해서. 내가 널 사랑한 이유 중 하나가 너의 감정이 투명하게 보인 것도 있었는데, 헤어질 무렵에는 그것이 헤어져야 하는 이유가 되더라.


너와 헤어진 이후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큰 해방감을 느꼈어. 너와 연애하는 동안 너도 그랬겠지만 나 많이 노력했거든. 그러다 보니 지쳐있었나 봐.


그래도 시간이 약인지, 2년 후 내 안에서 너와 헤어지기로 결정한 이유들이 희석돼서 어느 순간 네가 미치도록 그리워졌어. 이다음부터는 너도 아는 이야기. 염치 불고하고 너에게 몇 번 연락을 해봤는데, 다 무시당했지. 사실 그때 네가 날 받아줬어도 애매했을 거야. 우리가 다시 연인이 된다고 한 들 그때처럼 서로만을 바라볼 순 없고, 이미 서로에게 상처가 된 우리 사이를 정성 들여 이어 붙인다고 한들 예전처럼 될 수 있겠니. 그래서, 너의 숱한 거절들이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우리의 사랑은 확실하게 마침표를 찍었고, 그 걸 찍은 이는 나였지만, 너는 내 마음 한편에 남아 때로는 첫사랑으로, 때로는 유일한 사랑으로, 때로는 추억으로 자리를 잡았지. 이후로도 연애를 몇 번 해봤는데, 널 만난 뒤부터는 내 연애의 기준은 '너'가 되어 있어서 쉽지만은 않더라.


그렇게 어영부영 적당한 연애를 하고, 적당한 이별을 경험하기를 반복하고 있던 도중 나간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다 취해 습관처럼 네 이야기를 했어.


"지나간 인연 중 도무지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로 시작됐던 너에 대한 이야기.

그걸 잠자코 듣고 있던 그 사람이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일단 당신이 이별을 고했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은 거예요. 정말 사랑했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든 붙잡아뒀을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지나간 인연에 대해서 고민하지 말아요."


우리의 이별에 대해 드라마나 영화 속 대사에서 나올법한 상투적인 말로 단정 짓길래 함부로 말하지 말라며 따지고 싶었는데, 저 말을 곱씹다 보니 이상하게도 너를 향한 습관이 멈추어졌어. 너에 대해서는 유난히 'What if'를 써서 우리의 마지막을 변형시키곤 했거든. 꽤 오랜 시간 동안. 예를 들면, 내가 만약 우리에 대해 지쳤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을 했다면, 우리가 잠시 서로에 대해 재정비할 시간을 가지고 다시 만날 수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우리의 끝이 조금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뭐 이런 것들.


근데, '사랑하지 않았어요.'라는 말에서 저 무수한 가정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사실 마지막엔 내가 너에게 참 이기적으로 굴었고 너의 사랑이 나의 사랑에 비해 크다는 이유만으로 너를 할퀸 순간들이 많았잖아. 그런 주제에 웃기게도 널 무의식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나 봐. 그래서 이별 후에도 너에게 열려있었던 내 마음의 방 문을 꽁꽁 닫기로 마음먹었지. 이게 쉽게 되진 않아서 가끔 그 문이 다시 열리곤 했는데, 또 닫고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너를 향한 내 마음은 과거의 것으로, 추억으로, 그리고 지금은 아주 흐릿한 몇몇 개의 기억으로 변해갔어. 


조금은 달랐던 우리가 인디 힙합 음악을 토대로 취향을 나누고, 같이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대화를 섞고 그렇게 시간을 들여 서로를 공유하며 우리는 점점 비슷해져 갔지. 마주 보며 웃는 시간들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너는 나처럼 웃게 되어갔고. 나의 콧잔등을 찡그리고 웃는 습관까지 닮아가는 너를 보며 만족해했던 내가 있었어. 그렇게 너는 나를, 나는 너를 닮아가며 서로에게 스며들었지. 너에 대해 남은 것 중 추억이 아닌 것들은 이제 이런 것들 뿐이네.


그때의 나는 그때의 너를 뜨겁게 사랑했지만, 우리는 이미 끝난 인연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어. 너는 다른 인연을 만나 나에게 했던 것처럼 그 사람을 성실하게 닮아갈 거고, 나 또한 우리의 관계에 더 이상 미련 떨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너만큼, 아니 어쩌면 너 이상으로 나를 공유하며 연애를 하게 되겠지.


헤어진 이후 쭉 난 너의 안녕을 바랐어. 이번에도 힘주어 너의 행복을 바랄게.

나보다, 아니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하며 평범하고도 고귀한 삶을 살고 있기를 바라.

이제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지만, 나는 이렇게 너라는 세계에 대해 글을 쓸 때마다 종종 우리를 떠올릴게.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는 우리를, 서로를 향한 애정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던 우리를, 애칭을 쓰는 우리를.


그럼 당분간 너에 대한 회고록을 쓰기 전까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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