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나는 아직 백록담을 못 봤다. 한라산에는 딱 두 번 올랐는데 한 번은 대학교 3학년 때 과 친구들과 한 여행에서, 한 번은 몇 해 전 엄마와 함께. 두 번 다 영실 탐방로로 윗세오름까지 올랐다. 한라산엔 가보고 싶고, 8시간 동안 산을 탈 자신은 없고. 그래서 3~4시간 사이의 코스를 선택했다.
처음 한라산에 올랐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2005년 8월, 푹푹 찌는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친구들과의 여름 제주도 여행 중 갑자기 시작된 산행. 나는 발가락이 다 튀어나온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나를 뺀 친구 셋은 모두 시폰 스커트를 입고 에나멜 샌들을 신고 흙을 밟고 돌을 디디며 걸었다. 주위 등산객들이 “아이고, 치마를 입고 산에 올라가네~”라며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친구들은 끝이 없이 이어지는 길에 백기를 들고 내려갔고, 나는 조금 더 올라가 보겠다며 혼자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그리고 조금만 가본다는 게 풍경에 이끌려 결국 윗세오름까지 가버렸다.
엄마와 함께 올랐을 땐 30대 초반이었다. 오전 7시, 제주공항에서 등산복 차림으로 엄마와 만났다. 딸은 김포에서, 엄마는 김해에서 날아왔다. 잠깐 인사를 나누고 산행을 시작했다. 딸은 가벼운 차림이었는데 엄마는 등산 가방에 이것저것 챙겨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해, 엄마가 챙겨온 비닐 우비를 야무지게 입고 함께 걸었다. 엄마는 천 원짜리, 딸은 3천 원짜리를 입었다. 힘든 티를 내면 엄마가, 딸이 걱정할까 봐 다리가 후들거리는 데도 둘은 4시간 동안 비를 맞으며 씩씩하게 걸었다.
영실 탐방로로 오르다 보면 멋진 풍경이 많지만 나는 무엇보다 우리나라 유일의 고산초원이라는 선작지왓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해발 1600m에 있는 평평한 관목지대. 봄에 오면 철쭉과 진달래가 그득하다는데, 겨울에 오면 그 설경 또한 대단하다는데 나는 두 번 다 여름에 방문해서 봄과 겨울의 풍경은 아쉽게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뜨거운 날에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짙푸른 초원 사이를 걷는다는 건 봄의 꽃 보다 훨씬 더 환상적이다. 빗물에 드러난 해발 1600m 신록의 풀밭을 비와 구름, 안개 사이로 걷는 일은 하얀 설경보다 더 몽환적이다.
여행 중 단독행동으로 미움을 샀던 나는, 졸업 이후에도 세 친구와 다른 길을 가게 됐다. 셋은 모두 학교 선생님이 되었고 나는 졸업 이후 십여 년간 하나의 직업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무작정 나이만 드는 삶을 살았다. 잠깐 다른 일을 해본다는 게 각종 우연과 필연에 이끌려 k개의 직업을 거치게 됐다.
지나고 보니 한라산의 좋은 풍경만 기억에 남긴 했지만, 사실 계단으로 이뤄진 데크길을 계속 걷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누군가는 영실코스가 계단 데크길이 주로 이어져 힘들지 않다고 하던데, 나는 그 ‘계단 데크길’이 힘들었다. 하산 길엔 다리가 꽤 후들거렸다. 옆으로도 내려가 보고 수시로 다리를 풀어가며 걸었다. 한라산 고유의 풍경이 끝나고 그냥 산의 풍경으로 들어왔을 땐 언제쯤 하산 길이 끝이 날까 생각하며 계단을 하나하나 세면서 내려왔다.
외롭고 힘든 산행을 했음에도, 나는 여전히 백록담에 가봐야겠단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 이후의 여러 번의 제주 여행에서도 나는 한라산에 오르지는 않았다. 언젠가 가야지, 언젠가는 가야지 하는 생각만 했다. 예전과 같이 8시간 산행은 부담스럽고, 여전히 내 등산 체력은 8시간이 안 된다. 지난 건 시간일 뿐, 나는 여전히 말만 나불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