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초록 천막 1,2권 옮긴이의 말
한국에서는 2012년 제2회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한 덕분에 이름을 알린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는 1943년에 가족이 피난을 가 있던 러시아 바시키르 공화국에 있는 도시 다블레카노보에서 태어났다. 1931년부터 1941년까지 정치범으로 유배 간 할아버지는 1948년부터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울리츠카야 가족은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울리츠카야는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소련 과학 아카데미 유전 학 연구소에서 일했다. 당시 그녀는 어린이들을 위한 희곡을 썼으며, 몽골 시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했다. 1980년대 말에 여러 잡지에 단편을 게재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울리츠 카야는 직접 쓴 각본 〈리버티 자매들〉(1990)과 〈모두를 위한 여자〉(1991)가 상영되고 문예지 〈신세계〉에 중편소설 《소네치카》(1992)가 게재되면서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소네 치카》는 1994년에 프랑스에서 가장 우수한 번역서로 선정되며 프랑스의 메디치상을 수상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강 작 가가 2017년에 《희랍어 시간》으로 메디치 외국문학상 후보에 오른 바 있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고 자 유롭게 사고하며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작가이다. 또한 여 러 해에 걸쳐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려 애쓰는 작가인 그는 소설 속에 다양 한 여성들을 등장시키며 역사 속 여성의 목소리를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울리츠카야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철학자로 남으려고 노력해요.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 든 것을 다 이루고 자신의 한계에 도달하면 집에서 사색하고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해야 할 과 제를 가장 멋진 방식으로 이행하고 시대에 굴하지 않으며 부도 덕한 행위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는 여자들이야말로 한 민족을 구성하는 사람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20세기를 통틀어서 대외적으로 다 양한 전쟁을 겪었고, 남자들은 끊임없이 내전이나 세계대전이 나 수용소에서 죽어나갔어요. 감옥에 수감된 사람도 많았고, 알 코올중독이라는 인류 최대의 재앙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도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남은 여자들의 삶도 녹록지 않았는데, 여자들은 혼 자서 자식을 키우며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도 해야 했어 요.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남자들이 없기 때문이죠. 러시아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의지와 달리 훨씬 고차원적인 평등을 겪어야 했죠. 다리를 짓고, 철로를 놓고, 전시에는 공장에서 무기를 만 들기도 했어요. 서유럽에서 여성들이 평등을 외칠 때 러시아 여 성들은 자녀를 키우고 그녀들을 보살펴줄 남자를 꿈꿨어요.
이러저러한 이유로 수많은 남자들이 죽어나간 후 아이들과 홀로 남겨진 여자들은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에서 페미 이즘이 독특한 양상으로 발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비의 균 형이 오래전부터 깨진 탓에 여성의 수가 월등히 많은 러시아에 서는 이미 어떤 종류의 평등이 실현되었고, 남성과 같은 일에 종 사하는 데다 집안일까지 해야 했던 러시아 여성들은 오롯이 누 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기도 한 것이다. 작가는 강해 보이고 강함을 강요받았지만 내면은 한없이 여린 러시아 여성들을 소설 속에 등장시키며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 말하는 듯하다.
《커다란 초록 천막》은 삶, 세대, 가족, 친구, 사랑, 배신 그리고 선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등장인물들이 성장하고 고통스럽게 자신의 인생 여정을 찾아가고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며 이혼을 겪고, 시기하고 사랑하며 미워하고 늙고, 결국에는 죽 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암울한 시대에도 사랑을 하고 이별의 아픔을 겪는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지 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그 일들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에서 작가는 함께 성장하는 세 명의 남자 친구들(사냐, 일리야, 미하)과 세 명의 여자 친구들(올가, 갈랴, 타마라)의 이 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들 한 명 한 명은 각각 특정 사회 계급을 대변한다. 사냐와 타마라는 인텔리겐치아의 후손 들이며, 올가는 장군과 문예지 편집장의 딸이고, 미하는 부모님을 잃고 친척 집에서 자라는 고아이며, 일리야와 갈랴는 평범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다. 그들의 성장 지점은 ‘새로 운 시대’를 예견하는 스탈린의 죽음과 맞닿아 있다. 스탈린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접하며 이들은 내면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가진다. 하지만 그들의 희망은 여전히 계속되는 억압 앞에서 좌절되며, 사랑, 공포, 배신 등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여러 난관에 부딪힌다.
소설은 ‘국민의 아버지’인 독재자 스탈린이 죽은 1953년부터 시인 브로드스키가 사망한 1996년 사이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얼핏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 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작가는 소련 시대에 지식인들이 얼 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를 그리고 있다. 당시 사람들이 소련 정 부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출간이 금지된 문학작품들을 인쇄하 거나 베껴 적으며 지적 호기심을 채워간 사실 역시 중요한 테마 다. 또한 소련에서는 출신 성분이 옳지 않다거나 가족이 어떤 일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고통받아야 했다. 실제로 스탈린 시대에 대략 9백만 명이 숙청당했다고 한다.
또한 소설에서는 데카브리스트들이 게르첸을 일깨웠으며, 게 르펜은 레닌에게 영향을 끼쳤고, 문학 선생은 세 명의 친구들에게 깨달음을 준 이야기가 나온다. 문학 선생인 빅토르 율리예비 치 솅겔리는 어린 시절과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는 진귀한 현상에 주목한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솅겔리 선생은 비고츠키의 연구에 관심을 가져 생물학자였던 친구와 대화를 나누며 동물이 외형적으로 유체 상태에서 성장을 멈추고 번식하는 유형성숙이라는 현상에 주목한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는 소설에서 ‘러시아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여러 가지 비 유로 표현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어 린 시절’이 무엇인지 깨달음을 넘어서 확신하게 된다.
예를 들어 1930년대에 소련으로 망명해 수용소에 수감됐던 독일인 교수 빈베르크는 러시아를 두고 ‘미성숙한 나라’라고 한 다. 그는 “러시아는 어린아이들의 나라라고! 문화는 어른들의 자연적 충동을 봉쇄해. 하지만 아이들은 예외지. 문화가 없으니 봉쇄도 없지. 러시아인들에게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면서도 동시에 통제가 안 되는 아이같이 미성숙한 공격성이 있어”라고 말한다. 또한 작가는 빈베르크의 입을 통해 반체제 인사들이 ‘양 심은 생존과 대치된다’는 원칙에 의거하여 생각하고 행동한다 고 서술한다. 즉, 반체제 인사들에겐 생존 본능이 결여되어 있으며, 본능을 넘어서는 성숙이야말로 진정한 어른의 특징이라 역 설한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역시 비중 있게 등장하며 꽤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닥터 지바고》와 《커다란 초록 천막》모두에서 주인공들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 속에서 자신 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아 헤맨다. 공통된 테마 중 비극적인 사랑 은 특히나 중요한데, 이 사랑은 삶과 가족에 대치된다. 하지만 《닥터 지바고》에서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본래 모습을 알아보지만 《커다란 초록 천막》에서 진정한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
《커다란 초록 천막》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일리야를 사랑하는 올가는 그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며, 마를렌은 오랫동안 자신을 사랑했던 타마라를 버리며 뻔뻔하게도 그녀에게서 굉장한 가치를 지닌 그림 몇 점까지 가져간다.
울리츠카야는 역사의 섬세한 증인답게 이들의 삶을 억누르는 당시의 시대를, 그 시대의 모습을 해석하며 묘사한다. 그녀는 러 시아 고전문학에 표현된 신구약 성경의 상징화라는 방법을 통해 정확하고 온당하게 당시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다. 소설의 배 경은 소련 시대이고, 울리츠카야는 이런 비인간적인 시대에 인 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에 대해 쓴다. 즉, 소련 시대를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 시대에 인간의 존엄 성을 지키며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는지를 생생히 드러 내 보인다.
제목 ‘커다란 초록 천막’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하나의 에피 소드의 제목이다. 죽어가는 여주인공인 올가의 꿈에서 지인들과 낯선 사람들 틈에 산 자와 망자가 함께 있고, 그들 모두는 천 상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는 초록색 천막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언젠가는 우리 모두 죽 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작가는 ‘천막’이라는 주제는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초록색은 생명, 자연, 조화를 상징한다.
울리츠카야는 우리 모두 힘든 삶을 사는 동안 갈등과 고통, 난 관을 극복하며 결국은 모두 평등하게 조화로운 자연 속으로 돌 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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