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일을 하면서 늘 저작권 계약부터 책 출간까지의 모든 과정에 관여를 해왔고, 그래서 작디작은 소박한 꿈이라고 한다면 ‘나도 우아하게 번역만 하고 싶다’이다. 사실 번역 자체만 보면 늘 해오던 일이라서 정말 새로운 분야만 아니라면 (소설의 장르도 생각보다 다양하고, 소재 역시 천차만별이므로) 우리말 해독만 가능하다면, (종종 독해를 넘어서 해독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역할 원문이 내 손안에 들어오기 전까지 수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 번역가는 인내심과 내공으로 중무장해야 한다.
저작권 계약, 무엇이 문제인가?
국립 어린이 청소년 도서관으로부터 번역 지원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무척 솔깃한 제안은 번역가는 번역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간절하지만, 무척 소박한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앞두고 잠깐이나마 설렜던 기억이 있다. 문제는 잠깐이라는 것이다. 역자가 저작권 계약에 개입하지 않으려면 저작권자와 국립 어린이 청소년 도서관(이하 ‘국어청’)이 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어야 하고, 양측이 쓰는 모국어가 다르므로, 사실상 세계 공용어인 영어로 소통이 가능해야 한다. 물론 우려했던 바와 같이 문제는 바로 양측이 소통하는 언어에서 시작되었다. 국어청은 영어권 출판사들과 이미 여러 차례 저작권 계약을 진행했던 경험도 있고 해서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직원이 있어서 큰 무리가 없었지만, 문제는 이미 150권 이상의 사서를 위한 책을 출간한 러시아 출판사에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직원이 없었고, 더 큰 문제는 해외에 있는 기관과 일한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이었다. 수차례에 걸쳐서 러시아 측과 옥신각신 통화를 하고, (수화기가 사람이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꾸역꾸역 계약서까지 갔지만, 계약서에 서명만 하면 되는 순간 러시아 출판사에서 망설였다. 마침 모스크바 근교에는 친한 러시아 친구가 살고 있었고, 이 친구는 각종 계약을 성사시킨 경험이 있었는데, 이 친구와 우연히 대화를 하던 중 이 계약 이야기를 하게 됐고, 친구가 러시아 출판사 직원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 그들을 안심시킨 후에 계약서상에 서명을 받아낸 기억이 있다.
인보이스의 배신...
이제 마음 놓고 편안하게 정말 이젠 일어날 일이 전혀 없다고 안도하던 때에 ‘인보이스’ 문제가 발생한다. 러시아 측에서 달러가 아닌 루블로 보내 달라고 했는데, 문제는 환율이 그날그날 달라지는 데다 국어청 관장님의 최종 결제를 받는 시간차가 존재했기 때문에 인보이스를 쓰고 폐기하기를 몇 번 반복한 끝에 겨우 저작권료를 보내게 된다.
아, 루블화 송금 너...
문제는 국내에 루블화로 송금할 수 있는 은행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평화롭게 시작된 아침이 사실은 나를 기만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달러가 아닌 루블로 송금을 해야 한다는 미션을 인지하고, 루블이 러시아 출판사 통장에 안전하게 들어가지 않는 한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은 수포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또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문제해결에 착수했다. 그 즉시 루블화 송금 경험이 있을 법한 한국문학번역원의 러시아어권 담당자, 외환은행, 신한은행에 전화해서 루블화 송금 사례에 대해 문의하고, VO 코드(송금 목적)는 러시아에서 사업하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수취은행 (러시아 은행) 직원을 통해 알아내고, 러시아 출판사에는 인보이스에 명시된 금액으로 다음날 송금하게 해달라고 양해까지 구하고, 다음날에는 루블화 송금 영수증을 확인하면서 대략 10개 정도 되는 숫자의 조합 중에서 틀린 숫자 하나를 찾아내서 (국어청의 사서 분도 그 많은 숫자를 확인할 생각은 어떻게 하며, 또 틀린 숫자 하나는 어떻게 찾아낸 거냐며 놀람) 국내 루블화 송금 분야 최고 권위자이신 우리은행의 이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겨우 루블화 송금이라는 거대한(?) 미션을 해결했다.
인제 그만 사랑, 아니, 번역하게 해 주세요!
번역 지원을 받게 되면서 루블화 송금까지 신경 쓰게 될 줄 알았다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겠지만, 결국 1년 반 동안 오기 하나로 저작권 계약을 추진하면서 진이 다 빠져버렸다. 다행히 온갖 인맥을 동원해가면서 인생 헛살지는 않았다는 안도감과 이제는 정말 번역을 할 수 있겠다는 기쁨을 뒤로한 채 국어청과 역자 간 계약서는 자세히 볼 에너지조차 남아있지 않았지만, 이 계약서 역시 소홀히 할 수 없어서 꼼꼼하게 확인하고 서명하고 보니 정작 번역할 시간이 많지가 않아서 조급했던 기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