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가 되기 전 이야기 4
기숙사에서 생활할 때였다. 아침부터 배가 아픈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전날 기숙사 커튼을 단다고 무리를 하긴 했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옆 방에 있는 한국인 여학생들도 걱정이 됐는지 수시로 내 방을 들락날락하면서 걱정을 했다. 하지만, 배는 아무리 주무르고 기다려봐도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걱정됐던지 그 학생들이 내 석사 동기를 불러주었다. 동기가 배를 주물러줘도 차도가 없었고, 날이 어두워져서 병원에 갔다가는 기숙사 안에 못 들어올 것이 뻔했으므로 (당시 기숙사에는 통금 시간이 있어서 통금 시간이 넘으면 기숙사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았다) 나는 수면제를 먹고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도 배는 여전히 아파서 병원에 연락했고, 앰뷸런스가 도착하면서 나는 기숙사에서 의사에게 간단한 진찰을 받았다. 하지만 의사는 촉진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아무래도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아침에 나는 교회 목사님, 사모님과 함께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에 갔고, 병원에서는 피검사와 소변 검사를 포함해서 난생처음 산부인과 검사까지 받았다. 의사들은 모두 특별한 이상은 없어 보인다고 했다. 우리는 다 같이 병실로 이동했고, 마지막으로 외과 의사가 병실에 들어와서 내 배를 눌러보더니 나가는 것이었다. 그 전날부터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었던 나는 병실을 나가는 의사의 뒤통수에 대고 ‘저, 이제 뭐 좀 먹어도 되나요?’라는 다소 황당한 질문을 던진다. 물론 이 황당하다는 것도 의사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었지만, 내게는 피 같은 한 끼가 걸린 문제였다. 그러자 의사 역시 이에 질세라 ‘이제 수술 들어갑니다.’라는 답변을 내게 던져주며 병실을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나와 목사님, 사모님 이렇게 세 사람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서 서로의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봤다. 만약 내가 의사에게 질문을 안 하고 수술실로 가게 됐다면, 쓸데없이 상상력을 동원해서 내가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에 끌려간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잠시 후에 나는 수술실에 누워있었고, 러시아 병원 수술실에 또 언제 누워보겠냐 싶은 마음이었는지 수술실에서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러시아어로 물어보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깼을 때는 수술 자국이 워낙 커서 그랬는지 굉장히 아팠고, 내가 너무 큰 소리로 울어서 옆 병실에서 ‘애를 지웠나 보다’며 안쓰러워했다는 말을 들었다. 러시아에서는 낙태가 흔했고, 내 울음소리가 아마도 낙태를 한 여자의 울음소리와 비슷했던 것 같았다. 나를 수술을 집도한 의사 역시 러시아에 유학을 온 흑인이었고, 집도의인 레지던트가 수술하는 동안 경험 많고 나이 지긋한 러시아 의사가 수술 과정을 지켜봤다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수술이 크든 작든 마취가 깨지 않아서 그대로 코마 상태로 빠지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내가 몸도 호리호리하고(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한국 아니, 내 기준이다) 키도 자그마한 동양인이어서 마취제 양 조절에 실패(?) 한 것인지 수술 끝나고도 2시간이 훌쩍 지나서 깨어나는 바람에 교회 목사님, 사모님과 같이 온 교회 동생들이 무척 걱정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던 나는, 천진난만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병원이 떠나가라고 울면서 마취에서 깬 후로는 어서 속히 가스가 나와서 밥을 먹을 수 있기를 바라며, 언제쯤 고체 형태로 된 제대로 된 음식이라는 것을 씹는 저작 활동을 할 수 있냐면서 간호사와 의사를 귀찮게 했다.
병실에 누워있는 동안은 수술과 관련된 다양한 용어를 익히고, 링거, 항생제, 부인과, 낙태, 관장 같은 용어들을 귀로 들으면서 무료함을 달랬다. 시립병원의 구조도 구경하고, 간호사들이 환자를 대하는 태도도 눈으로 보고, 러시아 할머니들과 같은 병실을 쓰면서 할머니들도 우리와 똑같이 이를 갈고 코를 고신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면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지금까지도 러시아 병원에서 보낸 열흘 동안의 추억은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자다가 떨어질 것이 걱정됐던 착하디 착한 교회 동생들이 마침 4인실 병실도 비어있고 해서 하룻밤을 같이 잤다. 나는 잠이 들어있었고, 같이 잠을 자던 동생이 인기척이 나서 깨어보니 수술실에 함께 있던 러시아인 의사 선생님이 술이 약간 취한 상태로 우리 병실에 들어오셔서는 측은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시고는 나가셨다고 했다. 그때는 술 드시고 병실에 들어오신 일로 인해 그 의사분을 조금 오해했지만, 나중에 감사하다고 봉투에 500 루블(?)을 넣어서 드리려고 했을 때 학생이 무슨 돈이 있냐며 한사코 안 받으셔서 그분이 좋은 분인 줄 알았다. 사실 러시아 의사들은 급여가 높지 않아서 꽤 많은 분이 선물이나 뇌물에 의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아주 많이 섭섭하실 수 있는 금액이나마 봉투에 넣어 갖고 갔는데, 그분은 봉투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끝내 봉투를 내 손에 다시 쥐여주셨다. 그때 나는 뭔가 모를 뭉클하고 따뜻한 감정을 경험했고, 나는 그분이 술을 드시고 병실에 들어오셨던 이유도 ‘정’이라는 감정 때문에, 마음이 약해서 그랬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체구 작은 여학생이 피붙이 하나 없는 먼 타국에 있는 시립 병원에서 맹장 수술을 받을 때는 ‘저 녀석도 형편이 녹록지 않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 수술 자국은 내 배의 한쪽을 차지하며 지금까지 유일한 수술 자국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