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의 정체, 그것이 알고 싶다.

번역가의 정체성 심층 분석

by 승주연

난 누구, 여긴 어디?


유감스럽게도 번역가의 역할은 번역에만 국한돼있지 않다. 번역가는 자신이 번역하고 싶은 작가와 책을 선정하고, 기획안을 작성하고, 작성한 기획안으로 출판사에 문의해서 출간 가능 여부를 타진해야 한다.

출판사 측에서 해당 도서를 번역 및 출간하는 데에 동의한다면, 그때부터 다소 험난한 길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번역가는 출판사 측에서 번역가에게 먼저 제안한 경우가 아닐 경우, 직접 책을 선정하고, 기획안을 작성하고, 출판사에 제출하고, 필요한 경우 (사실 유감스럽게도 내가 번역한 책들의 경우 이 '필요한 경우'에 대부분 해당됐다) 저작권 계약에 관여하고, 저작권 계약이 체결되면, 그제야 역자와 출판사간 계약이 이루어진다.


명이 길어야..


적고 보면 얼마 안 되는 이 일에 적게는 1년에서 9년까지 소요된다. 얼핏 보면, 저작권 계약이라는 것이 서류에 양측이 도장 혹은 사인만 하면 될 것 같지만, 계약 조건을 조율하기 위해 계약서를 던지고 받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물론 계약서를 주고받는 과정까지 가는 데만 적게는 수개월에서 수년까지 걸린다.

그 이유는 저작권자 측에서 번역 계약에 관심이 없거나, 저작권 계약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동안 수년이 흘러서 그동안 판권을 담당하는 에이전시가 바뀌는 등의 다양한 이유가 저작권 계약의 발목을 잡는다. 일례로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가 러시아어로 번역 및 출간되는 데는 무려 9년이라는 세월이 걸렸고, 이 책이 드디어 모스크바에서 출간되었을 때 시어머니는 내게 '어휴, 명이 길어야겠다야.'라고 말씀하실 정도니 책 한 권이 출간되는 과정이 얼마나 길고도 험한 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누구랑 얘기하면 되는데?


위에서도 언급됐듯이 번역가가 소통해야 할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한노 소설 번역의 경우,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서 번역하는데, 번역가는 저작권 계약 시에 도움을 줘야 한다. 약정서에 어떤 조항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저작권 계약이 체결되지 않으면, 책이 출간되는 것은 고사하고, 번역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번역가가 책을 번역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결국은 책이 출간되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출간된 책의 실물을 만져보는 것이므로, 번역가 역시 저작권 계약에 깊숙이 관여할 수밖에 없다. 한국 소설을 러시아어를 포함한 다양한 외국어로 번역하는 경우, 한국문학번역원과 대산문화재단의 번역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이때 역자가 저작권 계약을 포함해서 출간을 위해 소통해야 하는 기관은 한국문학번역원 혹은 대산문화재단 러시아어권 담당 직원, 특정 작품의 해외 판권을 담당하는 에이전시 대표, 한국 출판사, 저자, 러시아 현지 에이전시 담당자 혹은 제3 국에 있는 에이전시 대표 등이다. 물론 소통 언어는 주로 한국어 혹은 러시아어이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한 번은 마트에서 장을 보고 오이를 장바구니에 든 채로 꺼내지도 않고, 안방에 넣어둔 적이 있다. 의외의 장소에서 나온 의외의 식료품을 보고 당황하기도 했지만, 민망함이 더 커서 남편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면서, '네가 왜 거기서 나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역자의 역할도 생각보다 광범위해서 때론 황당하고, 때론 당황스럽기까지 해서 비슷한 질문을 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역자의 역할은 정말 그야말로 기상천외하기 때문이다. 역자는 작품 선정, 기획, 출판사 대표님 설득, 한국 출판사, 한국문학번역원 러시아어권 담당자, 러시아 현지 에이전시 등과 소통해야 하며, 번역은 물론 마케팅까지 신경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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