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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민 Oct 26. 2020

오춘기 어른 '어른 아이'

#사춘기를 제대로 보내지 못한 오춘기 어른 ‘어른 아이’
 
어른 아이
「 자신의 상처를 돌볼 줄 모르고 그렇게 성장한 어른 아이.  소녀로 돌아가 못다 어루만진 나의 어린 시절을 다시 담아내다.」

나는 사춘기를 잘 보내지 못했다.
잘 보내지 못했다는 것은 내 소리를 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니, 낼 수 없었다. 늘 불안했기 때문에.
그래서 늘 사람들 앞에서는 웃었다. 모두가 어쩜 그렇게 잘 웃느냐고 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왜 웃고 있는지 몰랐다. 그냥 웃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에.
 
10대의 사춘기를 제대로 겪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자 20대가 되면서 나는 조금씩 내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것은 마치 사춘기 때와 같은 요동치는 감정이 넘나들기 시작했다.
감정의 격한 변화들이 찾아왔고 그러면서 때아닌 오춘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quarter life crisis
1. 2~30대의 오춘기. (midlife crisis = 4~50대의 오춘기) 2. 오춘기,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오는 심리적 위기


-출처:네이버-



영어로 quarter life crisis를 오춘기라고 정의가 되어있다. 2-30대의 오춘기이자 심리적 위기.
그랬다. 정말 나는 오춘기였다. 난생처음 해 보는 사랑이란 감정을 앓으며 길바닥에 앉아 펑펑 울기도,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실컷 웃기도, 내 의견을 남에게 내세워보기도 하며 고집을 부려보기도, 참 다이내믹한 사건들의 연속이었고 그런 시간 속에서 온갖 방황과 헤맴은 멈춰지지 않았다.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내게만 존재하는 듯했다. 온갖 상처투성이의 시간들이.
전혀 마음의 준비도 없이 맞닥뜨리는 고통의 시간들은 감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아무 일 없듯 시계는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해내고 있었고 내게 나긋이 속삭였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그렇게 또 너에게 다시 새로운 아침이 찾아올 거야’ 라며.
 
우리는 어쩌면 끊임없이 쥐구멍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살고 봐야 하니 어느 구멍이라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깊고 긴 어둠의 길을 가기보다는 잠시 쥐구멍에서 쉬어 가는 것은 올바른 것 아닐까?
그 쥐구멍을 찾아 동굴 깊이 들어가 숨기도 한다면, 이후로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와 숨을 고르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길을 찾아 나선다. 또 다른 구멍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그 구멍들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몸집이 커지면서 그 구멍들도 점차 커다랗고 점차 세계화되어 갈 것이다.
구멍마다 많은 이야기들이 즐비한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깨달은 하나가 있다. 그 이야기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상처 받지 않는 이는 없다. 모두가 아프고, 모두가 시련을 겪는다.
상처와 고통은 드러냄과 드러내지 않음에 따라 다를 뿐.
그러나 나는 사춘기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기에 결국 20대에 발악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20대의 발악으로 인해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게 발악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그로 인해 내가 성장의 발걸음을 한 걸음씩 옮겨 왔음을.
성장할 당시, 그 시기마다 거쳐야 할 성장기들이 있는데 그때에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오히려 뒤늦게 발현이 되어 더욱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 또한 그랬다. 그랬기에 폭풍우 같은 20대를 보내었다.
그리고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끝날 것만 같지 않던 깊고 깊은 외로움이었다.
인정받고자 했지만 인정받을 수 없어 결국 나 스스로 해결을 해 나가야 했었고, 모든 길 위에 나는 혼자였다.
그때, 내 안의 메아리가 내게 외쳤다.
'나를 돌아보아줘. 여기' 라며.
잠시 멈춰있던 나를 돌아보니 마음 안 어린 소녀가 잔재해 있었다. 그 소녀는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어른 아이로 남아있었다.


아마 많은 어른들이 여전히 어른 아이로 남아있지 않을까?
돌봄을 받지 못한 채로 여전히 한편에서 울고 있는 어른 아이.
지금이라도 그 어른 아이를 발견했다면 오춘기를 맞은 당신, 다시 한번 그 어른 아이를 보듬어 주는 건 어떨까?
그리고 속삭여 보자.
‘내가 미안해,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하고.
마음으로 내가 나를 안아주자.
우리가 자신을 안아주던 때는 언제였던가.
그 아이는 여전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당신의 본연의 모습이기 때문에 오로지 당신만이 안아 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어린아이는 여전히 어른 아이가 되어 울고 있을지 모른다. 나를 돌아봐 달라며.
상처투성이인 나를 외면하지 말아 달라며..
 
나의 경우 그 어른 아이를 찾기 위해 무작정 떠났다..
내 자아를 찾기 위해. 잠깐 숨을 고르기 위해..
본연의 나를 찾기 위해..
 
여전히 헤매고 있는 어른 아이,
어쩌면 지금이라도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달라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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