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시간들이 사랑에 관하여 내게 알려준 것들
왜 매번
드라마, 영화,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은
여자가 떠난 후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걸까
왜 매번
열렬히 사랑하던 연인은
관계의 시차를 이겨내지못하고
이별을 맞이하는걸까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고나서야 나는
사랑하는 관계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과
여자의 시선은
서로 완벽히 다르다는것을
이해했다.
준고와 홍이는
처음 마주쳤던 역 앞 출구에서부터
서로에게 설렜다.
그 이후 몇번의 우연이 가져다준 만남을 통해
둘은 가까워졌고
대화를 나눴고
사랑에 빠졌다.
준고와 홍이는 서로를 열렬히 사랑했다.
열렬히 사랑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서로의 조건과 상황을 재는 어른의 사랑이 아닌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고
대화를 나누면서 설레어하고
상대의 손을 잡고 품에 안길 수 있음에 감사하는
그런 풋풋한 사랑에 가까워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로의 마음이 점점 깊어지는 순간부터
준고와 홍이가 관계를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달라진다.
준고가 쉬지 않고 일하는 동안
홍이는 혼자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준고가 일에 치여 홍이의 전화를 받지 않는 동안
홍이는 준고의 마음을 오해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어릴 때 이 드라마를 봤더라면,
나는 말했을 것이다.
저런 놈을 왜 기다려주는거야?
일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여자친구의 외로움은 하나도 이해를 못하는데.
너무 이기적이야. 때려쳐 얼른!!
이라며 닿지도 않을 잔소리를 해댔을 것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참 웃기게도
시간은 나에게 많은걸 알려주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랑을 대하는 남여의 차이.
당연히 일반화할 수 는 없겠지만
이제 적어도 준고의 행동은 이해할 수 있다.
준고는 홍이와 함께라 생각했다.
왜? 밤마다 같이 잠에 들고
아침마다 같이 눈을 뜨니까.
그리고 준고는 홍이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다.
결혼이란 직접적인 단어를 꺼내진 않았지만
(그리고 그마저도 이유가 있었고)
홍이와 함께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래서 준고는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누구하나 번듯한 일을 갖고있지 않아 불안한 현재보다
자신이 꿈을 이뤄 안정적인 삶을 누리게 되었을 때
홍이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리하여 준고는 평생, 함께할 미래의 시간들을 위해
오늘 홍이와 함께하는 10분의 통화를, 저녁식사를,
홍이가 가고싶어하는 지인의 결혼식 참석을,
하나 둘씩 포기한다.
홍이는 자신과의 시간을 조금씩 포기하는 준고가
자신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자신을 소중히 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은 타지에 살고있는 홍이에게
피할 수 없는 외로움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타지에서 먹고, 자고, 웃고,
행복해할 수 있는 이유가 되어주었던 사람이
이젠 그 공간에서 단 일분도 숨쉴 수 없게끔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느꼈을 것이다.
나를 둘러싼 공기와 이불 속 마저도 낯선 타지에서
아무에게도 기댈 곳이 없다는 사실이
나에게 안겨주는 외로움은
느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래서 나는
준고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한국어로
쉴틈없이 내뱉는 홍이의 울부짖음에
같이 울었다.
홍이가 말없이 뒤돌아 방에 들어갈 때 만이라도
잡아주지.
한번만 안아주지..
홍이의 말대로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해주지.
그치만 준고의 마음도 이제는 어렴풋이 안다.
그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미치도록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단지 하루 꼬박 밤을 새서 원하던 키링을 뽑아주는 것,
같이 호수를 달려주는 것,
맘에 들어하는 드레스를 입어볼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런 소소한 것을 넘어서서
평생 원하는 것을 안겨주고
평생 같이 뛰어주고
예쁜 드레스를 입고 평생을 함께하자는 맹세를
하고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경제적인 여유가 필요하다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 받지 못한 홍이의 전화는
오늘 함께하지 못한 저녁식사는
미래 함께할 수많은 시간들로 돌아올거라 생각했겠지.
그치만 보이지 않는 미래를
그 불확실함을,
혼자 견딜 수 있는 여자는 많지 않다.
남자를 이해하지만,
그 사람의 마음이 변한게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알지만
그럼에도 만질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다면
위태로워지는 것.
그것이 남여의 서로 다른 시각에서 비롯되는,
사랑이 가진 치명적인 약점이다.
여자에게 사랑은 현재일 때 가장 빛나고
남자에게 사랑은 미래를 약속할 때 가장 빛나는 것.
이 이치를 알고 난 지금의 나는
이토록 다른 두 남여가 만나
서로를 좋아한다 말하고
사랑에 빠지고
절대 헤어질 수 없어 평생을 함께하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이,
너무나도 경이롭다.
5년의 이별을 통해 시차를 열심히 줄여
서로에게 다시금 베니와 윤오가 된,
준고와 홍이 마저도.
그래서,
사랑은 위태롭지만,
그만큼,
사랑은 위대한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