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너미목장
길었던 여름을 보낸 후 첫 캠핑이었다. 최고 25도, 최저 13도로 좋은 기온에 우리 가족은 평창에 위치한 산너미 목장에서 캠핑했다. 우리는 이번 캠핑을 많이 기대했다. 길었던 여름 탓에 오랜만에 나온 것과 좋은 날씨가 이유였다.
도착 후 익숙한 위치에 자리 잡았고, 이른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들뜬 딸은 식사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놀이를 하기도 했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오랜만에 산속에서의 시간에 행복해하고 있을 때,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빠르게 자리를 정리하고 짐들을 텐트 안으로 옮겼다. 비는 예보에 없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많은 비로 계획보다 일찍 돌아간 작년 이곳에서의 캠핑이 생각났다.
세 가족 모두 텐트 안 난로 주위에 앉아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비가 빨리 멈추길 바랐고, 우리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다시는 오지 않길 바랐다. 첫날 저녁 비는 금방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비예보는 다음날까지 이어지지 않아 다음날에 대한 기대로 첫날 저녁의 아쉬움을 위로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날씨에 대한 걱정, 다음날에 대한 기대로 시간을 보내다 잠에 들었다.
아침에 텐트 위로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에 일찍 깼다. 혜원이와 딸도 마찬가지였다. 밖에 나와보니 텐트 주위에 호두껍질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이게 호두나무였구나'라고 생각하던 중 호두가 또 떨어졌다. 위를 보니 나무위에 다람쥐가 놀러 와 호두를 까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다람쥐들이 호두 먹는 모습을 한참 지켜봤다. 동물들을 마주하는 건 산이나 숲에서 캠핑하다 보면 종종 만나는 행운이다. 우리 가족은 귀여운 다람쥐들과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은 맑았고, 비예보는 더 이상 없었다.
약간은 젖어있는 숲이 주는 맑은 공기 덕분에 산속에서의 아침은 상쾌하다. 그리고 이런 환경에서의 커피는 특별하다. 혜원이와 딸이 먹을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나는 커피를 내려마셨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도 다람쥐들은 계속 놀러 왔고 딸은 다람쥐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연 속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다람쥐들을 따라다니는 딸과, 영상을 찍느라 딸을 따라다니는 혜원이를 보는 건 행복한 일이었다.
좋아 보였던 사이트에 계시던 분이 돌아갈 준비를 하시는 것 같아 여쭤봤더니 곧 떠나신다고 한다. 자리를 옮기는 걸 고민했고, 혜원이가 옮기자고 했다. 보통 이런 경우에 혜원이가 내린 결정들은 조금만 지나고 봐도 좋은 선택들이었다. 옮기자는 혜원이 말에 고민은 더 하지 않았다. 혜원이와 딸이 산책을 가 있는 동안 이사했다. 멋진 사이트였다. 둘째 날의 오전은 그렇게 지나갔다. 새로운 자리에서는 또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딸은 졸렸는지 낮잠을 자겠다고 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낮잠을 꼭 자야 하는 딸은 캠핑 올 때마다 신난 마음에 전혀 잠들지 않았었기 때문에, 낮잠은 혜원이와 나에게는 걱정거리였다. 그런데 이번엔 먼저 자겠다고 하더니 금방 잠에 들었다. 혜원이와 나 둘이서만 있는 시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먼산을 보고 있기도 했고, 자리를 옮기길 잘했다는 이야기, 요즘 우리 사는 이야기들을 했다. 별거 없지만 특별한 오후였다.
산너미목장에는 버거집이 있다. 간단히 식사하고 싶을 때 찾기 좋다. 이사 후 식사 준비가 귀찮아 우리는 점심으로 버거를 먹기로 했다. 작년에 이곳에서 식사하며 창밖으로 다람쥐들이 노는 모습을 한참 지켜봤었는데, 딸이 그걸 기억했다. 오늘도 다람쥐가 있을까? 하는 귀여운 질문을 하는 딸이었다. 우리 딸은 버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침에 신나게 놀아서인지 배가 고파서인지 거의 버거 한 개를 다 먹었다. 잘 먹는 아이가 아니라, 언제든지 잘 먹는 모습을 보는 건 반가운 일이었다.
혜원이가 하루 더 있다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 질문으로 나는 많이 들떴다. 멋진 사이트와 날씨였고 기온은 완벽했다. 이런 곳에 계획보다 하루 더 있는다는 건 선물 같았다. 우리가 살아오며 혜원이가 내린 결정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루 더 있는 결정은 좋은 선택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월요일에 꼭 마무리해야 하는 일이 있는지 생각했다. 없었다. 월요일에 있는 미팅들을 훑어봤고 중요한 미팅이 있는지 생각했다. 없었다. 모든 미팅을 취소하고 네이버에 들어가 1박을 더 결제했다.
산속의 저녁은 도시의 저녁보다 먼저 찾아온다. 우리는 모닥불을 피웠다. 모닥불 앞에서 놀다 저녁을 준비했다. 가을이 오고있음을 느끼며 맛있는 식사를 했다. 딸은 모닥불이 사그라들진 않는지 확인도하고, 장작을 집어넣기도 했다. 모닥불을 유지하는 과정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둘째날 저녁 시간을 보내다 장작을 모두 태우고 쉘터 안으로 들어왓다. 딸은 금방 잠들었고, 난로앞에서 혜원이와 좀더 이야기하다 먼저 들어가 딸 옆에 누워 딸을 한참 보다 잠들었다.
셋째 날 아침도 맑았다. 계획대로였다면 이날 아침은 짐정리에 정신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전날 하루 더 있기로 결정 했고, 덕분에 여유로운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아쉽게도 옮긴 사이트에는 다람쥐들이 오지 않았다. 여기 있는 나무가 호두나무가 아니라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침은 행복했다. 혜원이와 딸이 먹을 간단한 아침을 준비해 주고 나는 커피를 내려 마셨다. 딸은 캠핑 내내 바람개비를 가지고 놀았다. 집에서 출발할 때 우연히 들른 문구점에서 혜원이가 무심코 사 온 것이었다.
작년 이곳에 왔을 땐 계획보다 먼저 돌아가는 바람에 육십 마지기에 오르지 못했었다. 이번 캠핑에선 꼭 가야겠다고 하고 있었고, 셋째 날 산을 올랐다. 트래킹을 처음 한 딸은 언제 도착하냐고 여러 번 물었고 다리 아프다고도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우리 셋은 함께 노래 부르며 걸었다. 걷다 보니 흑염소들이 몇 마리 보이기 시작했다. 딸은 그때부터 힘든것도 모르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었고, 정상에 도착하니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많은 흑염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멋진 광경이었다. 자연친화적인 장면들이 주는 좋은 느낌도 있었고, 딸이 커서 우리 손을 잡고 산에 올랐다는 사실도 뭉클했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다. 딸이 크는 모습을 보는 건 늘 행복하기도 슬프기도 하다.
산에서 도토리를 많이 주웠다. 딸은 주운 도토리들을 가져다 쉘터 옆에 두고, 도토리를 먹으러 올 다람쥐들을 상상하며 행복해했다. 이런 작은 일에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딸이 귀여웠다. 나와 혜원이는 딸을 키우며 많은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결혼 후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었다가 마음이 바뀌어 아이를 갖게 되었다. 아이가 없었다면 여러 가지 취미와 활동들로 바쁘고 즐겁게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갖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느끼는 이런 행복은 있는줄도 몰랐겠지'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딸이 커갈수록 딸에 대한 사랑은 더 커진다. 그리고 혜원이에 대한 마음도 그렇다. 결혼할 때, 딸이 태어나 자랄 때 내 마음과 감정의 크기는 최대치라 더 커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신기하게도 감정들은 더 커져가고 더 채워져 갔다. 그럴 때 전에는 몰랐던 삶의 새로운 챕터가 열리는 게 아닌가 한다.
마지막 날 밤이 깊어갔다. 추워진 산속에서 우리 가족은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았다. 보통 캠핑을 나오면 딸은 이 시간에 잔다. 그런데 이날은 한참을 앉아 이야기하다 장작을 모두 태우고 함께 들어갔다. 행복했다. 커가면서도 딸이 나와 혜원이와 이렇게 언제든지 이야기했으면 한다. 그리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언제든지 우리에게 기댔으면 한다.
둘째 날 내가 이사하는 동안 산책하며 주워왔다고 한 밤을 구웠다. 밤을 굽는 동안 딸은 엄마 귀에 대고 비밀 이야기를 했다. '엄마 이 밤 어떤 할아버지가 준거 아빠한텐 비밀이야'라고 말하며 웃는데 모든 이야기가 다 들렸다. 딸은 내가 비밀이야기를 해줄 때도 늘 엄마 앞에서 내 귀에 대고 크게 이야기해 혜원이가 알게 된다. 이런 순수함이 오래갔으면 한다.
넷째 날 아침 자리를 정리했다. 작년의 산너미와 반대로 올해는 계획보다 하루 더 있었다. 모든 시간이 즐거웠고 행복했다. 아마도 우리는 내년 봄에 다시 캠핑하러 함께 나올 것 같다. 봄에는 이곳이 어떨지 궁금하다. 우리는 내년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