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한 뒤 고민된 것 중 하나는 나의 정체성이 었다. 정확히는 사회적 정체성이었다. 회사를 다닐 땐 다른 사람들을 만나도 내 설명을 길게 할 필요가 없었다. "저는 벤처투자자에요." 혹은 "VC에서 일하고 있어요." 라고 말을 하면 됐다. 벤처투자자는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직업이기에 설명을 하기가 쉬웠다. 직업과 회사를 말하면 다들 나를 좋게보거나 최소한 나쁘게 보지는 않았다. 확실한 직업과 배경이 내게 좋은 사회적 정체성을 만들어줬다.
이런 명확한 사회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가 없어지니 내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나는 뭐하는 사람이지?", "사람들에게 나를 뭐라고 설명해야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이 사라진 뒤 나는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내 삶은 대부분 내가 해왔던 직업에 매몰되어 있었기에 그 직업을 그만두니 정체성이 사라진 것이다. 만약 해왔던 일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으면 상관이 없었다. 계속 그것을 해오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일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계속 해왔기에, 그리고 다른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고 안했기에 그 일이 사라지니 정체성이 없어진 것이다. 어떻게보면 나는 원래 나만의 정체성은 없었고, 사회적 정체성만 있었던 상태였다. 그러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사회적 정체성이 사라지니 내 정체성 자체가 모호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정체성을 찾기 위해 벤처투자자로 돌아가는 것이 정답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벤처투자자로 일할 때 분명 사회적으로 나는 인정을 받았다. 투자자라는 직업과 나쁘지 않은 월급으로 받은 사회적 인정은 내게 강한 사회적 정체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사회적 정체성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정체성은 별개였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좋은 직업이라고 칭찬을 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긍정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침잠되어 갔다. 내가 기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아무리 칭찬받고 인정을 받더라도 기쁜 정체성을 갖기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제는 더 늦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한다. 남들의 눈에 좋아보이는 일, 혹은 사회적 기준으로 좋아보이는 일이 아니라 내게 정말로 기쁨으로 다가오는 일을 찾아야한다. 그 일을 꾸준히 하여 언젠가 타인에게 인정을 받았을 때 온전한 나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오래걸릴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꾸준히 해도 기쁨을 느끼는 일을 찾는 것만으로도 어려울 수 있다. 실력을 갈고 닦아 대중들에게 인정까지 받는 것은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 것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행복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이제는 경험으로 안다. 중간중간 조금 돌아가더라도, 다시금 자본과 명예에 못 이겨 쉬어가더라도 방향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정체성과 사회적 정체성이 언젠가 만나게 되는 날을 기대하며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