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어떤 이별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그것도 연달아 두 번씩이나.
2025년 새해를 야심차게 운동으로 맞이한 나는 그러고 나서 일주일 후 뜻밖의 이별 통보를 받았다. 무슨 일인지 원장님이 필라테스 센터의 폐업을 결정한 것이다. 아마도 건강상의 이유인 듯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열심히 달려보자고 으쌰으쌰 했던 우리였는데……. 하루아침에 나는 큰맘 먹고 일 년 치 정기권까지 끊어두었던 필라테스를 허망하게 그만두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이 다음 이별의 징조가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역시 10년간 살았던 안산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작은 설 명절이었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한데 모여 먹고 마시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회사 일과 야식집 운영으로 살인적인 노동량을 소화하느라 몸무게가 두 배로 불어난 셋째는 온몸이 쑤신 지 내내 드러누워 여기저기 주물러달라고 가족들을 잡아끌었다. 거실 한쪽 뜨끈한 온수 매트에 엎드린 셋째의 등과 팔다리를 돌아가며 안마하는 동안 우리는 회사를 때려치든지 야식집을 그만두든지 둘 중 하나를 하라고 염려 섞인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자연히 대화 주제는 중년의 건강관리로 이어졌고 환절기가 되면 한 번씩 아픈 곳과 증상에 따라 효과 좋은 영양제, 요즘 한창 유행 중인 마그네슘 스프레이, 탈모 방지 앰플, 보톡스까지 천년만년 살 것 마냥 제각기 알고 있는 건강 지식을 앞다퉈 쏟아냈다.
그러다 결국 우리가 아직도 너무 많은 시간을 일하는데 보내고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사십 대가 한창 일할 나이이긴 해도 회사 일과 야식집을 병행하는 것이나, 마흔 명에 육박하는 학생을 혼자 감당하며 학원을 운영하는 것은 좀 너무했다. 그나마 세 자매 중 나 하나만 여유롭게 시간을 쓰는 중이었다. 예전처럼 가까이 살면 서로 틈틈이 도울 수 있을 텐데 우리는 망원동과 안산, 이천으로 각기 너무 멀리 흩어져 있었다. 그렇게 안타까워만 하며 이야기가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을 때였다. 언니가 농담처럼 한마디를 툭, 건넸다.
“둘째야, 너 우리 학원 와서 일할래? 하루에 딱 세 시간만 하면 언니가 이백 맞춰줄게.”
“오~그럼 완전 꿀인데?”
“암! 오기만한다믄 맞춰주고말고.”
“진짜?”
이상했다. 지겹다고 투덜대면서도 그만두기엔 아까운 일자리와 지척에 살고 있는 딸, 제법 견고하게 쌓아온 인간관계를 다 내려놓고 이천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진지하게 든 것이다.
“집은 어떻게 얻어? 나 돈이 별로 없는데.”
“이천이잖아. 너 가진 보증금으로 전세도 얻을 수 있어.”
“그래?”
아아, 너무나도 솔깃한 것. LH의 은혜로 지금도 낮은 월세로 고퀄의 집에 살고 있건만 그마저도 안 내고 살 수 있다니……. 그렇다면 월급에, 월세도 굳고 줄어든 근무 시간 만큼 글 쓰는 시간은 늘어날 것이었다. 게다가 마침 내가 살고 있는 집의 재계약 기간이 도래하고 있었다. 일단 마음이 기울자 대화가 급물살을 탔다.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엄마도 두 손 들어 환영했다. 독립하고 혼자 사는 내가 늘 마음에 걸렸는데 언니 옆에 가서 살면 얼마나 안심이 되겠느냐며 “가라, 가. 너무 잘됐다. 언니도 영판 모르는 사람 쓰는 것보다야 네가 낫지, 안 그러냐?” 하고 부추겼다.
“언니 학원 쪽에 전세 있으면 한 번 생각해 볼게.”
대화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그러고는 설마 했는데 명절 낀 주말을 지내자마자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예상한 보증금에, 오래된 저층 아파트지만 관리가 잘 되어 사는 데 불편함이 없고, 관리비도 매우 저렴하며, 심지어 학원과 바로 마주하고 있는 동의 전세 매물이 딱 하나 나와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모든 상황이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된 이상 안산과 이별을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이별에는 후유증이 따르는 법. 시작은 쉬웠지만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학원은 새 학년이 시작하는 시기에 맞춰 수강생 모집이 끝나야 하므로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한 달이었다. 그것도 꽉 찬 31일도 아닌 28일짜리 2월. 엄청난 한파가 몰아치던 날, 나는 내 고용처인 시청과 파견근무처 두 곳을 합쳐 총 세 곳에 이별을 통보했다. 나도, 상대도 경황이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자세한 사정을 주고받지도 못한 채였다. 그러곤 곧 이사 준비에 돌입해야 했는데...덜컥 몸살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아니, 그것은 몸살로 시작한 대대적인 병치레의 서막이었다.
으슬으슬한 한기와 근육통으로 시작한 증상은 초기 감기약으로 수그러들지 않고 두통과 고열로 이어졌다. 그때라도 병원에 갔어야 했는데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십 년이나 산 지역을 떠나는 일이라 정리하고 준비할 게 많았기 때문이다. 이천에 집도 보러 가야 하고, 이사 갈 집이 정해지면 살고 있는 집 계약 해지 신청을 해야 하고, 각종 은행 업무에 이삿날에 맞춰 포장 이사 업체 견적과 잔짐 정리, 안산에서 벌여 놓았던 일들도 마무리해야 했다. 지금 아플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조금 나아진 것같은 느낌이 들어 방심하던 순간 이번에는 위가 단단하게 뭉치기 시작했다. 먹는 족족 토하다 설사를 하고 괜찮아지는가 싶다가 어지럽고. ‘안 되는데, 할 거 많은데…….’ 하면서도 나는 도통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누워 있으면 귀 안팎이 아팠고 뭘 먹으려면 턱에서 뚝뚝 소리가 났다. 잠이 들라치면 누가 발바닥을 주먹으로 패는 것 같은 열감이 일었다. 도무지 무슨 병인지 알지도 못하게 몸 구석구석이 돌아가면서 아픈 게 마치 신내림이라도 받는 것 같았다. 급한대로 나는 약물 오남용을 시도했다. 이전에 코로나에 걸렸을 때 받아온 약 봉투를 찾아 염증과 진통제, 위산과다 억제제 같은 것들을 골라 먹었다. 그러면서 스물스물 비현실적인 불길함에 휩싸였다. 이것은 안산을 떠나지 말라는 계시인가? 혹시 가면 죽기라도 하는 건가?
하지만 이미 굴러가기 시작한 운명의 수레바퀴는 속도를 내고 있었고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닥친 일들을 힘겹게 해치워갔다. 내 몸의 약한 곳을 차례차례 공략하며 괴롭히던 병마는 급기야 가장 독한 수를 두었다.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출산한 여성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쓰라림, 인간이 직립 보행을 이룬 댓가로 얻게 되었다는 뒤끝 작렬의 말할 수 없는 그 고통! 덕분에 나는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하며 쩔쩔매다 이사를 코 앞에 두고 여의사가 진료한다는 병원을 다급히 찾았다. 수치스러운 진료가 끝나고 의사는 이대로라면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겠다는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선생님, 저는 이사를 가야 한답니다. 부디 무사히 안산과 이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대략 그런 뉘앙스의 읍소 끝에 소중한 한 뭉치의 내복약과 연고를 받아낼 수 있었다.
나는 수시로 눈앞이 하얘지는 고통을 힘겹게 이겨내며, 받아온 약을 죽과 함께 성수처럼 소중히 챙겨 먹어가며 무사히 이사를 마쳤다. 포장 이사 직원들이 새집에 짐을 풀어놓고, 이사를 축하하러 온 가족이 모두 돌아가고 난 후, 한 달 내내 나를 괴롭히던 병마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그냥 사라지긴 서운했는지 입술에 커다란 물집과 피딱지를 남기고서.
‘그래, 잘 가라. 훠어이~가 버려!’
서운함이라고는 먼지 한 톨만큼도 남지 않는 이별이었다. 내 평생 남자와도 그렇게 혹독한 이별을 겪어보지 못했건만 쯧!
그러나 이로써 십여 년 전 상도동에서 모여 살다 헤어진 세 자매 중 둘이 이천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억울한 마음은 접어두고 새롭게 시작해 보기로 한다. 곧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셋째도 이곳으로 불러와 완전체가 될 것을 기약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