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에겐 너무 좋은 세상

<휴먼스> ,영국드라마, 2018

by 이찬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집 『나무』에는 온통 말하는 기계에 둘러싸여 피로함을 느끼는 남자가 등장한다. 마치 사람처럼 말투를 바꿔가며 잠을 깨우는 자명종과 신으면 “자아, 앞으로 갓!”하고 힘차게 구령을 넣는 슬리퍼, 다정한 토스터와 커피 머신, 의자……. 남자가 일어남과 동시에 소형 스피커와 음성 합성기를 부착한 물건들이 사람처럼 상냥하게 말을 걸며 스스로 움직인다.


그는 물건이 생명의 흉내를 내는 것에 무척 혐오감을 느끼는데 마침 그날 아침 아름다운 여자 도둑이 침입해 말하는 물건들을 모조리 훔쳐 가버리고 만다. 값비싼 물건들이 아깝긴 하지만 그로서는 고맙기도 한 일이었다. 그러나 결말은 반전이었다. 카페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도둑에 의해 남자의 정체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토록 기계를 혐오하던 남자 역시 사실 기계였던 것이다. 도둑은 남자의 가슴 속 인공심장을 꺼내들고 말한다.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이여,
그대들에게 진정 영혼이 있는가?

「내겐 너무 좋은 세상 中」




<휴먼스>를 보며 나는 내내 오래 전 읽었던 이 소설을 떠올렸다. 소설을 읽었을 당시 말하고 움직이는 것을 넘어서 인간을 대체하게 된 기계의 등장이 무척 오싹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날로 발전하여 허구 속에 존재하던 일들이 빠르게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속도라면 소설에서처럼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는 로봇이 생겨날 만도 한 것 같다.

천재 과학자 데이비드 엘스터는 인공지능에 의식을 낳는 프로그램을 삽입하는데 성공하여 각성한 여섯 명의 인조인간을 만들어낸다. 이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지만 정체를 숨기고 인간 추격자들로부터 도망 다니며 온갖 고난을 겪는다.

정말 이상한 것은 애초에 기계에 불과했던 인공지능에 의식이 부여되자 그들을 통해 인간의 잔혹성이 적나라하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인간은 죽은 자신의 아내와 꼭 닮은 로봇을 대체품으로 만들어내고 가사도우미 로봇에 19금 코드를 입력하여 섹스돌로 이용하기도 하며 아예 매춘용 로봇에 변태적인 욕구를 해소하기도 한다.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면 그런 행동이 아무 문제 되지 않는 것일까.


데이비드 박사에 의해 의식을 가진 상태로 창조된 로봇 니스카는 그런 인간들에게 분노하여 마구잡이로 공격을 시작한다. 그러나 후에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인간을 만나게 되고 이전의 살인에 책임지기위해 재판을 신청한다. 그녀는 자신이 인격을 지녔음을 증명하기 위해 실험실에 갇혀 온갖 테스트를 거치지만 결국 재판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총 세 개의 시즌으로 이루어진 <휴먼스>에서는 인격을 가진 소수의 인공지능이 의식을 생성하는 코드를 발견한 뒤 동료들을 한꺼번에 각성시키며 더욱 많은 갈등과 이야기가 펼쳐진다.

인간과 다름없어진 인공지능과 여전히 그들을 기계로 분류하는 인간들, 그리고 그 사이에 공존의 방법을 모색하는 이들의 얽히고설킨 감정과 에피소드들.


사실 로봇이 인격을 가진다는 게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근 미래에 그런 일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는 로봇으로 설정된 존재가 반드시 로봇일 필요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인간의 나약함과 잔인함, 따뜻함과 이기심 같은 것들을 마치 거울처럼 인간의 특성을 가진 또 다른 개체에 비추어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서 그런지 그중 유독 아이가 나오는 에피소드에 마음이 갔다.

부모님처럼 바쁘지 않고 화도 내지 않는 인공지능 미아에게 너무 깊이 마음을 준 나머지 그녀의 말투와 행동을 미러링 하는 소피. 자신이 받은 상처를 표현할 방법을 몰라 감정 없는 인공지능이 되고 싶어 하는 소녀 리나.

가족보다 휴대폰과 보내는 시간이 많은 요즘 아이들에게 이것이 곧 벌어질 일이 아니라고 말 한 수는 없으리라.


어쩌면 기계가 인격을 갖추는 것보다 인간이 기계화 되는 일이 더 빨리 일어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뛰어난 인공지능이 아니라 인간인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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