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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란 Nov 28. 2023

이혼이라기보다 독립



네가? 도대체 왜!

남편과 이혼하기로 했다는 말에 가족들은 그렇게 되물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내가 그럴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특히 나의 엄마는 일생일대의 배신을 당한 사람의 표정으로 분노를 쏟아냈다. 엄마의 한탄 속에서 나는 잘난척하느라 스스로 신세를 망친, 인생의 실패자, 남들 앞에 내놓기 창피한 딸이 되어버렸다. 남편과 부모님 사이가 각별했으므로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었지만 도대체 왜? 라는 질문에는 답할 도리가 없어 막막했다. 마음속에서는 이혼이 아니라 독립이라고! 하는 풀죽은 외침이 웅웅댔지만 결국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엄마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았다.      

시댁에 빚 문제가 있었지만 신혼 삼사 년을 제외하면 남편과 크게 다툰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한쪽이 이혼당할만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족과 아이의 눈을 피해 거의 매일 치열하게 싸웠다. 남편의 회식이 유난하던 시절엔 수시로 그를 의심하고 괴로워하기도 했다. 이혼 이야기가 나온 후 안 일이지만 놀랍게도 남편 역시 나에 대해 같은 마음으로 한참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결혼 한 달 만에 아이를 가졌다. 그 후로는 줄곧 혼자일 틈 없이 아이를 돌보고 살림과 일을 병행했다. 그런 내게?하는 의문과 억울함이 울컥 솟아 남편에게 화를 냈다. 그렇지만 마음이 한풀 가라앉고 나자 그에게 설명하지 못한 채 기를 쓰고 붙잡고 있던 내 안의 어떤 것을 돌아보게 되었다. 실체는 없지만 내내 나를 장악하고 있는 그것을 남편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아주 어렸을 적 대상포진에 걸린 적이 있다. 처음엔 등이 가렵고 아프더니 옷이 닿기만 해도 심하게 쓰라렸다. 그냥 그러다 말겠지 하던 중 아이 예방접종을 하러 간 병원에서 우연찮게 병명을 알게 되었다. 의사는 펄쩍 뛰며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호통쳤다. 당시에 나는 하루 종일 내게 매달려 있던 아이가 잠들고 나면 밤마다 방통대 강의를 들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나 아깝고 소중해서 허기진 사람처럼 허겁지겁 책을 읽고 과제를 했다. 자주 깨는 아이 때문에 때론 30분 때론 1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을 쪼개 써야 했지만 그마저 하지 않으면 내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치료가 끝난 후 약봉지를 든 채 유모차를 끌고 돌아오는 길에 생크림이 잔뜩 든 빵을 하나 사 먹었다. 그게 어찌나 달고 맛있던지...

돈이 있어도 없어도 나를 위한 지출은 일단 접어두고 보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나의 이혼이자 독립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일지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남편은 자기 전 내게 “도망가지 마.” 라는 말을 굉장히 자주 했다. 어려서부터 혼자 자는 습관이 있었던 내가 결혼해서 남편과 함께 자는 걸 힘들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따로 자게 되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진 후에도 나는 틈만 나면 서재방으로 숨었다. 일을 핑계로, 책을 읽는다는 핑계로, 대학원 과제를 핑계로……그야말로 핑계일 뿐인 것들로 방에 들어가 혼자 있었다. 언제든 뛰어나가 남편과 아이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으로 문밖의 인기척에 귀를 곤두세우고 있으면서도 그렇게까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걸까.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이혼하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무척 고민했다. 만약 남편이 이혼을 원하는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면 아직도 혼자 끙끙 앓고 있었을 것이다.

한때 힘든 시기가 있었지만 부부로서 잘 헤쳐나왔고 행복한 시간이 점점 늘어났으며 아이는 스무 살이 되던 해였다. 더 이상 가족 문제로 애쓸 일이 없었다. 문제는 나 하나였다. 남편은 입버릇처럼 내게 그간의 고생을 보상해 주고 싶다고 했고 이미 충분히 그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에게 보상은 그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십 년을 같이 산 사람에게 사실 당신은 내게 의미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 같았다. 그는 노력하고 있고 덕분에 모두가 행복한 와중이었다.     

남편은 내게 잠시 혼자 살아볼 것을 제안했고 나는 거절했다. 법적으로 혼자가 되지 않는 이상 내가 짊어진 며느리, 딸, 아내로서의 책임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죄책감 느끼지 않고 나에게 몰두하는 상태. 이혼이라기보다 독립이라고 생각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에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밤 우리는 마주 앉아 무척 울었다. 그리고 서로 애썼다, 고맙다, 응원한다는 말로 이혼을 시작했다.


* 매거진에 연재했던 글은 책 <나의 경우엔 이혼이라기보다 독립> 으로 출판하였기에 일부만 남기고 발행 취소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aladin.kr/p/hQF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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