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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피 Apr 05. 2021

32. '우울한 나'에게 부탁하는 말

/ 우울의 계절 : 봄

앞사람과 나, 그 쓸쓸한 걸음 사이로 바람은 지나갔다. 무감각이 내리는 비는 외투만을 적신 채 검갈색 땅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왔음을 각인시키지 못하여 종일 허공 속에 물질을 해대고 있다. 식료품점 간판 빛은 일상의 나와 같이 또다시 흐릿해지기를 반복하고 갈라진 아스팔트 사이로 줄줄 빗물은 새어 들어간다. 이 비는 변함없이 아래로 흘러 아무도 모르게 큰 물에 엮이고 말 것이다.

그러했다. 예전과 지금, 주변의 일상처럼 나의 몸과 정신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깊은 밤마다 내일을 고대하며 변화를 갈망했지만 아무것도 못한 나는 똑같은 내일을 목전에 두고 있다. 돌이켜보면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지만 습관처럼 기대하고 실망하는 사이 이미 수년의 시간은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 나날의 크기만큼 우울의 바닥은 깊어졌으며 나는 나를 믿지 못하는 고질병에 천착하여 스스로 가슴에 멍을 기고 있는 중이다. 한 때 유려한 말과 멋진 몸짓으로 현혹했던 나를 의심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남루한 추억으로 연명하고 다.

어느새 마른 잎에 초록이 칠해졌고 춥고 까칠던 바람은 습습한 온기를 전하는 시절이 되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이들의 겉옷 또한 하나 둘 벗겨지기 시작했으며 노랑의 개나리처럼 한 때를 풍미하여 그들의 일상을 기억하려 할 것이다. 이 또한 언젠간 떨어질 벚꽃처럼 기댈 것 없는 시간의 소비자로 변하고 말겠지만...


촉촉하고 미끈하며 때론 흐린 비가 반투명의 시선을 적시면 무던하던 외로움도 끝내 빈틈을 찾아 내 기억의 언저리를 차지해 버린다. 늘 그랬듯 걱정은 소심함에 종속되었고 깊어진 쓸쓸함은 이내 이를 증명해 버리곤 했다. 어둑한 오후부터 새벽까지 온밤 인내를 거듭하던 슬픔이 또는 후회가 소름처럼 살결을 어루만지며 사라진 기억 속을 난도질하고 있다.

목석처럼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나날, 타인의 만족이 내 만족이 되고 타인의 불평이 내 부족함이 되는 일들, 습관에 익숙해진 목적 없는 행위들,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곁에 필요한 이도 누구인지 모르는 어리석음, 눈을 뜨는 것이 고통인 아침, 홀로라는 벽이 위안이 되는 영혼, 한 때의 기억을 먹이로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삶, 이 일들이 지속되면 나는 죽음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일상은 멈추지 않는 물살처럼 제 길을 가고 있으나 난 삶의 파도에 역류한 흰 거품 덩어리에 의지한 채 떠밀리고 있다. 그렇게 허무한 시간과 잡히지 않는 공간 속에 나는 서있다. 나는 단 한 번만이라도 나만을 흠뻑 탐닉한 적이 있었는가? 나의 나는 무의미한 것인가? 시간은 사라지고 과거마저 무기력해지고, 잃은 것에 집착하는 나, 나는 어쩔 것인가. 그래서 나는 매일 고단하다.

이 지독한 병으로부터의 해방은 헐벗은 나를 위로하는 것이 그 시작일 수도 있다. 모퉁이 밖으로 접혀 힐끗 쳐다보는 낯선 나를 끄집어내어야 한다. 초라한 내가 사라질 것에 조금도 연연할 이유는 없다. 우리의 삶은 늘 일정량의 감정의 무게를 유지하며 반반의 행복과 슬픔이 공존해 왔으니 말이다.


시간은 울타리 건너 바람에 놓쳐버렸다. 가슴에 여민 쓸쓸함의 내음은 일렁이던 바람에 의탁하였다. 창틈에 산산이 스며든 내 안의 눈빛을 바라본다. 하루가 지나간다는 건 또 하나의 내가 사라지는 것과 같을 것이다. 붉은빛 산 아래로 어제의 나는 지고 단지 어둠 속을 걷고 있을 뿐이다. 긴 골목 옆에 한 움큼씩의 후회를 쌓아 두고 잠을 청해야겠다.


흩어진 화려함에 아쉬워할 것도 떨치지 못하는 불안에 조급해할 필요도 없다. 그 무거운 발길을 억지로 되돌릴 필요 또한 없다. 온전한 내 몫의 삶으로 슬픔을 토해내고 어둠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그래서 과거에 맞설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외로움은 나의 것이 되어도 좋을 것이다.  

우울과 외로움은 서로의 목적을 공유하여 우리를 슬프게 하였다. 가끔이라는 시간을 전제로 평온의 일상을 공격해 왔다. 일말의 행복은 긴 불행을 이기지 못한 채 삶은 일그러졌고 나는 무너지기도 했다. 부패한 감정의 썩은 냄새로 일상을 더럽혀왔으며 주변의 타인을 제거하기도 했다.

시절에 맞게 계절이 바뀌 듯 감정은 반복을 통해 나를 시험하고자 했다. 연민이라는 궁색한 이유로 연약해지거나 추억이라는 시간의 마약으로 나를 괴롭히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는 나를 힐난했고 충분히 소외시켜 왔다. 너무 유약한 나는, 나를 챙기지 못하였으며 늘 지난 에 미안해 왔다.


감정에도 새싹은 돋고 꽃은 필 것이다. 어쨌든 겨울과 같던 어제를 이겨냈으니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무성한 잎으로 시작해서 원하던 열매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 믿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 대한 예의 일지 모른다. 다가올 겨울에는 다시 외롭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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