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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민 Jan 17. 2024

마리

빨간 머리카락

 마리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마리와 나는 꿈 젤리 팝업 스토어에서 만났다. 지렁이 모양 꿈 젤리는 정말이지 강력해서, 웬만큼 꿈에 빠진 이가 아니면 들여다보지 않는 종류였다. 그 앞에서 나는 당연히 서성거렸다. 나는 내가 이 젤리를 감당할 수 있는 대담한 사람인지 판단하는 중이었다. 그 고민 끝에서 결단을 참아 본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나에게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분위기를 잡아보는 그 시간이 즐거웠던 것 같다. 그때 누군가 파란색 지렁이 젤리가 가득 든 봉투를 덥석 잡아 들었다. 파란 젤리는 젤리 중에서도 독한 것이었다. 하들하들한 빨간 머리칼 사이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괜히 다른 젤리를 집었다. 지렁이 젤리를 골랐다가 따라 사는 것처럼 보이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편이었다. 어쨌든 좋아하지도 않는 곰돌이 모양 젤리를 손에 쥐고 돌아오는데, 별안간 분노가 치솟았다. 곰돌이 젤리는 맛도 없고, 꿈에서도 별로였다. 나는 그날 최고로 지루한 꿈의 밤을 경험했고, 다음날 다시 팝업 스토어에 찾아갔다. 이번에야말로 지렁이 젤리를 살 참이었다. 이번에도 그가 있었다.

 어떻게 그와 사랑에 빠졌는지는 설명하지 않겠다. 나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마리는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부분에서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 마리가 무얼 해주었고, 어떤 말을 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마리는 내게 아주 잘 대해주었지만, 그런 걸 제외하고서라도 좋은 사람이었다. 평범한 좋은 사람. 사람의 장점을 잘 보고, 정을 쌓고, 인연을 무겁게 생각하는 사람. 함부로 상처 주지 않는 사람. 자신을 아끼는 사람. 마리는 좋은 사람이었다. 내가 늘 좋은 사람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종종 나는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과 사랑에 빠졌었던 것 같다. 사랑의 한가운데에서는, 사랑과 나, 이 둘만 보여서 당시에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사랑의 핵으로부터 물결처럼 밀려나 그 밖에 다다르면 사랑하는 이의 몰랐던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겉면이 보인다. 사랑할 적에는 속과 속만이 맞닿아 있었기에 볼 수 없었던 그 사람의 겉. 그렇기에 때때로 우리는 전 연인에게 실망하곤 한다. 그렇게 별 볼 일 없는 사람인 줄은 하나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듯이 말이다. 나 또한 예전의 그 사람에게 별 볼 일 없어졌을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조금 쓸쓸해진다. 어쨌든 사람의 겉을 제대로 보는 것은, 전 사랑을 단념하기에 유용했다. 나는 밤처럼 검은 일기장에 대고 마리의 겉을 하나씩 적어나갔다. 그가 미웠던 일들, 미운 모습, 미운. 마리도 겉이 있는 사람이고 몇 가지 사건은 정말이지 별로인 것들이었다. 나는 빼곡한 글씨로 몇 장이나 마리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누구에게 보여줄 수 없을 만큼 유치하고 구린 이야기가 몇 장을 가득 채웠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마리와 꿈 여행을 했을 적 마리가 불같이 화를 내다가 휘청거리며 기절한 이야기에 더불어 그때의 표정이 마취된 바다코끼리 같았다는 내용을 적는 거다. 결론적으로 뭘 적든 간에 마리의 겉에서 미운 건 없었다. 상처와 부끄러움은 있을지라도 도저히 밉지는 않았다. 그냥 어깨를 꽉 깨물고 바보라고 말하고 싶은 정도라는 게 문제였다. 그러니까 마리는 좋은 사람이었던 거다.     

 아쿠아리움에서 아늑한 나의 방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이 채 안 걸렸지만, 나는 보이는 공원마다 들어가 몇 바퀴를 돌았다. 벌써 자정이었다. 연말의 눈 쌓인 공원에는 한밤에도 사람이 많았다. 누군가와 함께 있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인 사람들이었다. 나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중앙유치원 옆 공원에서 머리끝까지 목도리를 두르고 마리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사람이 도착할 거라는 믿음이 있는 이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나도 언젠가 저런 표정이었을까? 아니, 나는 평온했던 적이 없다. 가장 믿음직한 사람과의 약속에서도 난 항상 불안해야 했다. 혹은 평온을 넘어선 행복을 느껴야만 했다. 그것 또한 깊은 슬픔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기다리는 것은 일방의 일이다. 기다림에 부응하는 것도 일방의 일이다. 그것이 나에게 행운인지 고통인지 혼란스러웠다. 일단 머리가 너무 시렸으므로 오래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약속도 안 했고, 마리네 집은 이쪽도 아니었다. 나는 잠시 카페에서 몸을 녹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카페 쿠’. 중앙 유치원 바로 맞은편에 밤에 여는 카페가 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카페 사장이 원래 하고 싶던 것은 주점이었는데, 유치원 바로 맞은편이라 문제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그 사장은 그냥 가게의 이름을 ‘카페 쿠’로 바꾸고 커피 기계를 들여와 커피를 몇 종류 팔았다. 어쨌든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카페의 큰 통창을 대충 가리는 거대한 커튼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카페에는 사람이 많았다. 자리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침한 도둑처럼 안을 들여다보는데,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겁에 질린 것 같았다. 약간 민망해진 마음으로 창가에서 떨어져 나의 모습을 살폈다. 나는 흰 목도리를 눈만 빼놓고 온 상반신에 칭칭 두르고 있었다. 바닐라 크림을 올린 컵케이크 같은 몰골이었다. 그러니까, 별로 사랑스럽지 않은 컵케이크 말이다. 나는 목도리를 풀어 손에 쥐고 카페에 들어갔다. 한 자리가 남아 있었다. 카페 한가운데 위태롭게 마련된 1인용 테이블이었다. 누구도 그 자리를 먼저 선택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치이는 비좁은 자리였다. 먼저 선택할 권리가 없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았다. 오늘 새벽에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나는 따뜻한 오렌지 주스를 시켰다. 직원이 주문을 받으며 나를 힐끔 쳐다봤다. 이런 걸 누가 먹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마리와 헤어지고 난 후 언젠가부터 술을 잘 안 하게 되었다. 술은 마실 당시에는 진통제 역할을 톡톡하게 하지만 그 후에는 인간을 더 무너트린다. 정말이지 으스러트린다. 나는 속절없이 휘둘리다가 정신을 겨우 차린 날에 온 집의 술을 다 버렸다. 그런 탓에 이번 겨울에는 고구마 라테만 마셨다. 나는 커피를 못 마시기 때문에 보라색, 혹은 연노란색의 고구마 라테만 줄기차게 마셨다. 그래서 오렌지 주스를 시킨 거였다. 지겨우니까.

오렌지 주스는 나를 후회 가득한 어둠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지는 않을 거였다. 다만 입구가 넓은 잔에 나온 그것은 서성거리는 주정뱅이들 속에서 위험천만하게 출렁거렸다. 야구모자를 쓴 주정뱅이 1이 테이블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내 어깨를 툭 쳤고, 기어이 오렌지 주스를 테이블 위에 쏟게 했다. 주정뱅이는 정중하게 사과했다.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점잖은 주정뱅이라고 생각하며 티슈로 오렌지 주스를 문질러 닦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나는 마리에서 시작된 모든 생각이 열대우림의 어린 뿌리처럼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뿌리들은 개별적인 사건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 마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쪽에 앉으셔도 돼요”

아까 창밖의 나를 겁에 질려 쳐다봤던 남자였다. 그는 카페 구석의 2인용 테이블 자리에 있었다. 그는 몸집보다 커다란 코트를 입고 푸른색 모자를 썼다. 사양하기 위해서 입을 연 순간, 전의 그 주정뱅이 1의 왼 팔꿈치가 내 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머리카락이 없기 때문에 충격은 고스란히  두개골로 향했다. 가끔 죽음을 볼 때가 있다. 0.5초 정도. 결국 나는 남자를 따라서 자리를 옮겼다. 이 자리는 훨씬 나았다. 여기에서 보니 카페의 한가운데는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하는 무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남자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우선 그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 동네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나는 정중하게 물었다.

“커피를 시키셨군요”

“네,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는 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에 두었다. 세상에, 그의 빨간 머리카락이 갑자기 등장했다. 마리보다 짙은 빨강이었다. 그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칵테일을 시키셨네요”

“오렌지 주스예요. 미지근한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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