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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난지 Jun 03. 2021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

틸리 월든의 <스피닝>

 

만화 속 주인공들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남장을 한 채로 동생의 일터로 잠입해 도둑질을 하고(<나오세요, 로미오>), 천재 심리학자로서 남의 마음을 속속들이 꿰뚫어보면서 자신의 마음은 알지 못하기도(<닥터 프로스트>) 합니다. 평범하지 않은 이들은 극적인 이야기 흐름에서 반드시 필요하며, 비범함은 주인공의 조건이 됩니다. 간혹 평범한 주인공도 있지만 알고 보면 마법사의 자녀이거나 미처 깨닫지 못한 강대한 힘을 갖고 있어 좀처럼 평범한 ‘나’와 같은 주인공을 찾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만화에서는 특별하고 독특한 세계관에서 비범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활약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평범한 ‘나’에 주목하는 장르도 있습니다.       


자전만화는 작가 자신이 겪은 삶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자전만화 작가들은 보통 기획 초기에 본인이 겪은 억울함과 부당함을 만화에서 다 쏟아내고 싶어 합니다. 그 분노가 창작의 동기가 되어 만화에 직접 반영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창작의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자전만화 작가들은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로 정리하면서 본인의 과거를 되짚습니다. 이 과정에서 처음 마음먹었던 기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작품이 만들어집니다. 세상을 향해 뻗어 있던 모든 감정들이 작가의 내면으로 향하는 것이죠. 독자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감정의 기억을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의 원인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만화가 틸리 월든도 12년간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활약했던 자전적 내용을 그린 <스피닝>에서 그러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는 <스피닝>이 스케이트에 대한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스케이트장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이고 고압적인 분위기와 사건들을 폭로할 결심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완성하고 나니 스케이트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스케이트를 타며 느꼈던 감정을 전해주려 했는데 인과관계 없는 일련의 사건들이 떠올랐고 그 사건이 자신을 강렬하게 사로잡고 있단 것을 뒤늦게 안 것이죠. 틸리는 <스피닝>을 만들며 자동차 추돌 사고를 당하거나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해도 밖으로 내비치지 않고 혼자 감내했던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러 사건들을 겪은 것이 명확한 삶의 변화로 나타나진 않았지만 자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틸리는 초능력 같은 대단한 능력을 가졌거나, 속한 세계가 특별히 독특한 것도 아니지만 <스피닝>이 주는 울림은 큽니다. 우리도 틸리처럼 내 인생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기 어려워서 공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알아내려 하는 비밀을 먼저 알아챈 것처럼 느껴져 대리만족의 감정을 느끼는지도 모르지요. 또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노력하던 지난날의 자신이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공감하는 지점은 나를 이해하는 게 너무 어렵다는 겁니다.   

  

<스피닝>은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인 틸리의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스피닝> 속에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한 삶의 여정이 숨어 있어서입니다. 틸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삶의 원동력이자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스피닝>과 같은 자전만화의 주인공이 비범하거나 특별하지 않아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모두 그러한 인생을 살고 있어서가 아닐까요.


청강뉴스레터, '재미의이유'에 싣기 위해 쓴 글.


스피닝 | 창비 – Changbi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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