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암 투병 일기 세 번째 이야기
병원 투어(2) 그리고 수술 준비
첫 번째 병원에서 잡아준 날짜는 9월 2일. 지금으로부터 2주나 넘게 남았다. 암은 처음인지라 엄마와 아빠는 불안해했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2주 동안 저 녀석이 더 커지면 어떡하지. 어떡하지
첫 번째 병원의 진료가 끝나고 집에 내려오자마자 다시 서울로 가야 했다. 엄마의 지인이 다른 곳의 병원을 알아봐주었기 때문이다. 혜화를 다녀온 것은 8월 16일 월요일, 아산으로 가야 하는 날은 8월 18일 수요일. 아빠는 괜히 기대를 해본다. 이곳에서는 좀 더 빨리 수술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다른 수술은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암 수술을 받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이 명의라 칭하는 이들이 있는 병원은 수술과 진료가 몇십 개나 몰려 있어서 예약조차 잡을 수 없다. 우리의 경우 곧 추석이 오는 날짜였기에 하루빨리 수술을 해야 했다. 이번에도 역시 먼저 내가 먼저 서울에 가 있기로 한다.
두 번째 병원의 의사는 더 친절했다. 사무적인 말투도 아니었으며 우리가 질문하는 것들에 정성을 다해 답해줬다. 아빠는 이곳에서 수술받기를 원했다. 지민아, 여기에서 수술받고 싶어. 선생님, 저희 아빠 여기서 수술받을 수는 없는 걸까요. 처음에 다녀오신 곳이 가장 빠른 날짜일 겁니다.
진료실을 나오며 아빠의 얼굴을 바라봤다. 원하던 곳에서 수술받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일까. 그래도 수술받을 곳이 있긴 있다는 안도일까. 아니지, 수술은 받을 수 있지. 얼마나 빨리 받을 수 있냐의 문제일 뿐.
아빠 무슨 생각해? 아빠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첫 번째 병원에서 수술받는 게 나을 거 같아. 원래 진짜 실력자들은 무뚝뚝한 편이잖아. 첫 번째 병원에서 잡아준 날짜도 엄청 빠른 날짜라고 하던데. 거기서 받자.
이미 첫 번째 병원에서 수술받기로 일정을 확정했던 우리는 그렇게 병원 투어를 마쳤다. 병원이 확정되자 아빠의 이마 위 팽팽했던 주름 중 하나가 느슨해진다. 남은 기차가 몇 없었기에 역순행 기차를 탄다. 나 역순행 기차 타면 멀미 나는데. 어쩔 수 없잖아 아빠. 아빠를 간신히 설득해 기차에 오른다. 아빠는 자꾸 장이 불안해, 보채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잖아 최대한 집에 빨리 가는 게 이 기차라고. 아빠 집에 빨리 안 가고 싶어? 집에 가고 싶잖아. 우리 엄마 곁으로 가자. 우리는 그렇게 다시 집으로 향한다.
아빠의 수술까지 나는 많은 것을 했다. 당시 아무것도 하지 않던 상태였던 나는 아빠와 하루를 함께 했다. 아빠의 아침과 점심을 챙기고, 나름대로 나만의 일을 만들었으며, 실행했다. 언니를 따라 빵을 구웠고, 하워와 산책을 나갔으며, 공부를 했다.
하루는 마지막 남은 사랑니를 빼러 갔다. 나는 사랑니가 총 네 개 있었는데 하나는 빼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었다. 스무 살, 세 개의 사랑니 중 두 개의 사랑니를 뺀다. 잔뜩 부어오른 볼을 본 채 왜 사랑니야, 사랑이 이렇게 아픈 거라고? 괜히 투정을 부려본다. 그렇게 남은 하나의 사랑니는 나의 오른쪽 영구치에서 야금야금 썩어만 갔다.
아빠 병원 데려다줘. 무더운 여름날. 암 환자인 아빠의 차에 올라 사랑니를 빼러 간다. 아빠, 난 불효년이야. 환자인 아빠에게 병원 데려가달라고 하고. 그렇지? 나의 농담에 아빠는 웃어 보인다. 맞아, 나쁜 딸이네.
아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빠는 병원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일주일 전 치아 약을 타와서 먹고 있었던 지라 이는 빠르게 뽑을 수 있었다. 딸기 스무디 사주세요. 너는 사랑니 뽑은 애가 찬 걸 먹냐. 그는 나무라면서도 카드를 꺼낸다. 아빤, 이런 사람이다. 고등학교 3학년 내내 아침저녁으로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왔던. 새벽 6시 출근이지만 10시 넘어서 끝나는 나를 데려왔던. 아침엔 나보다 일찍 일어나 나의 교복과 아침에 사용할 수건, 치마를 입을 땐 속바지까지도 챙겨줬던. 우리 아빠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아직 아빠에게 아무것도 갚지 못했다. 아빠는 오래오래 살아야 했다. 내가 당신에게 받은 것들을 다시 돌려드릴 때까지.
아빠의 병원을 따라갈 보호자는 내가 됐다. 그 말인즉슨 병원에서 개강을 해야 한다는 뜻. 그래,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어. 우선 내가 아빠를 따라가면, 수술 직전 엄마가 올라온다. 엄마의 월차가 모두 끝나면 간병인이 오기로 했다. 그렇게 아빠는 세 사람의 간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아빠가 짐을 챙긴다. 초가을이니까 쌀쌀할 수 있어. 이 셔츠도 입어보자. 짐을 싸다 지친 아빠가 소파 아래 드러눕는다. 아빠, 떨리지 않아? 괜찮아.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취업이 한창인 첫째, 대학 막 학기를 졸업하는 둘째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막내, 마지막으로 고생만 한 그의 아내를 생각했다. 술도, 담배도, 가족력도 없는 그에게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분노에 분노. 또다시 분노. 그렇지만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는 생각. 살아남고 싶다.
수술이 끝난 후에야 그가 밝혔던 당시의 기억.
8월 31일.
운명의 날이다. 점심 즈음에 도착한 우리는 수술 전 마지막 만찬을 위해 식당을 물색했다. 아빠 뭐 먹고 싶어? 아무거나. 편한 거. 아빠는 곰탕을 먹는다.
맛있네. 애써 웃어 보이지만 눈은 웃지 않는다. 지금 그는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병원에 도착했다.
아빠는 6호실에 입원했다. 아빠는 환자복을, 나는 보호자띠를 받는다. 바코드가 찍힌 종이 보호자띠. 조그맣던 내가 이렇게 자라 아빠의 보호자가 되다니. 기분이 이상하다. 보호자용 침대에서 자본 것은 처음인데. 이틀 잘 지낼 수 있겠지. 담요, 옷가지들, 베개로 사용할 쿠션, 영어 문제집들을 꺼낸다. 누가 병실에서 영어 공부하고 개강하겠어.
아빠는 안경을 쓰고 병원 안내서를 읽는다. 지민아, 환자들은 수술 후에 이렇게 한대. 간호사 선생님이 주신 공이든 모형도 열심히 불어 본다. 수술 후에도 이렇게 잘 불어야 하는데. 벽에 달력이 있다. 7월과 9월. 우리의 9월은 어떻게 되는 걸까. 아빠의 9월은. 내년 9월은?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다.
엄살이 심한 아빠는 바늘 하나도 무서워한다. 링거를 꼽자 아빠가 아악- 소리를 지른다. 링거도 무서워하는데 수술은 어쩌려고.
6419호의 네 명의 환자들과 보호자 중 가장 어린 사람은 나. 손녀딸이신가요? 염색을 하지 않아 새하얗게 머리가 새어버린 아빠와 나를 보며 그런다. 아니에요, 딸이에요.
그렇게 병원에서 하루가 지나간다.
9월 1일.
개강하는 날. 그리고 수술 전날.
수술 전 아빠에게 주어진 숙제. 약을 먹고 장 비우기. 제모하기. 산책하기. 그리고 용기 내기.
아빠 나 개강 좀 하고 올게. 전날 미리 수업을 들을 카페를 알아봤다. 그런데 음... 이렇게 시끄러운 곳일 줄이야. 어쩔 수 없지. 병원 지하 1층. 각종 푸드코트와 편의시설이 있는 이곳 중 하나의 카페에서 나는 개강을 한다. 아빠의 보호자가 된 내가, 병원에서 개강을 하고 있다. 아 어떻게 병원에서 개강할 수 있냐고? 코로나로 비대면이니깐 가능한 시나리오다.
수업 내용은 들려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내는 소음이 더 커서도, 교수님의 목소리가 작아서도, 아닌 그냥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내일 괜찮겠지 수술이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아빠는 살아날 수 있겠지. 아빠는 할 수 있겠지. 제발 내일이 왔으면, 아니 오지 않았으면.
그렇게 엄마가 도착했고,
나는 엄마와 바통을 터치했다.
9월 2일.
아빠는 수술실에 들어갔다.
저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래도 있다면
만약에 말이다. 존재한다면
저희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2시간이 넘는 수술. 수술 중에서 불은 꺼지지 않았고, 무교인 나는 이 세상 모든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에게 빌어본다. 그리고 수술실 밖에서 자신의 남편을 기다리고 있을 나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그들의 안온한 밤이 다시 찾아오기를 바라며.
아빠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 아빠의 암 투병일기- 세 번째 이야기
딸이 쓰는 아빠의 암 투병일기. 우리 가족은 오늘도 이겨내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