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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May 25. 2021

명태 배를 가르며 보내는 어떤 이들의 밤

자로 잴 수 있는 삶도 평가의 대상이 될 삶도 없다

밤 11시가 훨씬 넘은 시각, 산속 깊숙이 위치한 공장에선 쉴 새 없이 물소리가 들렸다. 눈 내린 산길은 험했지만 공장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냄새와 소리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장은 24시간 돌아간다고 했다. 낮보다는 밤이 '그림'이 더 나을 거라 했다. 촬영 분량은 많지 않았다. 때문에 서울로 돌아가는 길 마지막 촬영으로 빼둔 것이었다.


나는 미리 설명을 들었던 만큼 충분히 예상되는 그림이 펼쳐질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간과한 게 있었다. 그 안의 사람들이었다.


공장 문을 열자 산더미처럼 쌓인 명태 배를 가르는 어르신들이 보였다. 내장이 제거된 명태는 물에 씻겨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큰 통으로 옮겨졌다. 익숙하게 작업 중이던 어르신들의 시선이 낯선 우리에게 잠시 머물렀다. "서울에서 왔다고?" "네" "멀리까지 오느라 고생했네. 춥지? 커피 한 잔 줄까?" 금세 따뜻한 커피가 우리 다섯 명의 손에 각각 쥐어졌다. 불청객이자 방해꾼일 뿐인 우리를 어르신들은 시종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언제부터 일하셨어요?" "오래됐지. 놀면 뭐해. 여기서 일해서 손주들 맛있는 것도 사주고 아주 좋아"


공장을 한 바퀴 돌며 어르신들께 말을 붙이던 나는 담당 피디와 스케치할 그림에 대해 짧게 얘기한 뒤 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두운 차에 가만히 앉아 깊은 숨을 몇 번이고 쉬다 이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기억한다. 울먹이며 지인에게 전화를 건 내가 한 말은 "사는 게 왜 이리 슬프냐"였다.




여전히 너무도 생생한 8년 전 일화다. 나는 모르지 않았다. 그때 공장 문을 열고 마주한, 누군가들에겐 그저 일상인 풍경 앞에서 실은 내가 온전히 서 있을 수 없었던 이유를.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지만 왈칵 쏟아질 뻔한 눈물을 꾹 참았던 이유를. 그때 나는 비린내 가득한 곳에서 명태 배를 가르며 밤을 보내는 이들의 삶은 행복하지 않다고 멋대로 판단했었다. 그리고 타인의 삶을 순간 내 멋대로 판단하고 안쓰럽게 여겼던 그 오만함에 대해 두고두고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누가 누구의 삶을 짐작하고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을까. 감히 그럴 수 있기는 한 걸까. 아니.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자로 잴 수 있는 삶은 어디에도 없고, 평가의 대상이 될 삶 또한 없기에 누구도 타인의 삶에 대해 말할 자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면 될 뿐이다. 그것만이 '더 나은 삶'일뿐이다.




초겨울부터 봄바람 불 때까지 넉 달을 얼고 녹기를 반복해야 만들어진다는 황태를 볼 때마다 길에서 만난 또 하나의 풍경이 나를 지나간다. 한겨울 늦은 밤 산속 깊숙이 자리한 공장에서 불청객들을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따뜻하게 맞아주던 긴 방수 앞치마와 장화 차림의 어르신들이. 여전히 조금은 내 가슴 저릿하게 만들고 날 부끄럽게 만드는 그때 그 어르신들의 웃음이 휙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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