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추어탕
"네? 174센티미터라고요?"
"대한민국 평균남성 키에요. 뭘 그렇게 놀라세요?"
신생아 때 키가 54센티미터였고, 자라면서도 반에서 줄곧 큰 편이었던 우리 집 장남의 키로 걱정을 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나였다. 어디서 나온 자만심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 아이는 당연히 클 거라고 믿었던 나의 자만함 말고는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다.
"아니, 남편키가 183 센티민터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작은 키라서요..."
"아니, 엄마가 평균이잖아요. "
어머! 그렇다.
실은, 난 대한민국 평균 여성키보다 1센티는 작다.
키는 수면, 음식, 운동, 이 세 박자만 잘 맞춘다면 충분히 노력여하에 따라 더 클 수 도, 더 작아질 수도 있는 것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어쩜 좋아. 엄마가 작아서 우리 아들 작게 크는 건 아닌지, 3학년 일 년 동안 수학학원을 다니며 하루에 쳐내야 할 수학문제양이 엄청나 괜히 아이를 늦게 재운건 아닌지, 무조건 9시 전에는 잠들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살다가 이제 좀 풀어주던 나날이었는데, 어떻게 다시 잠자리 시간을 정하나 오만가지 걱정이 끊이질 않고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왔더랬다.
남편에게 이러한 사실들을 카톡으로 주절이주절이 늘어놓은 채로...
우울했던 것도 아주 잠시.
집 근처로 차를 몰고 가는데, 내 소울푸드인 추어탕 맛집이 보인다.
그래, 못 먹어도 고!! 우선 먹고나 보자.
나는 홀로 추어탕집에 들어갔다.
나는 혼밥을 좋아한다. 특히 내 혼밥메뉴 중 일등은 추어탕이고, 이등은 장어탕이다.
점심시간 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꽤 많다.
그리고 4인테이블에 혼자 앉은 사람은 오늘도 나뿐이다.
추어탕 일 인분을 시키고, 가만히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삼삼오오 모여 앉은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추어탕이란 메뉴답게, 어르신들이 많이 오셨다.
금방 5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식당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언제부터 혼밥을 먹기 시작했더라. 스무 살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교내식당에서 3000원의 행복을 만끽했던 나날들.
친구들이랑 함께 밥을 먹었던 적도 많지만, 시간 맞추기가 번거로웠던 난 곧 잘 혼밥을 먹었던 것 같다. 한참 공부에 열중할 때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다니며 혼밥을 했던 적도 많았다. 혼밥을 할 때 좋은 점은 내가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뿌듯함이 절로 든다는 것이다. 어렸을때는 혼자 식당에가서 음식을 시키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언제부턴가 먹고싶은 메뉴를 골라 혼자 밥을 먹는건, 나에게 있어 행복이다.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 할 수 있는 행복.
20대초반 언젠가. 아웃백에서 홀로 앉아 스테이크와 와인을 한잔 마시던 우아한 중년여성이 내 기억속에 오래토록 잊혀지질 않았다. 나에게 있어 혼밥은 메뉴만 다를 뿐, 그런 당당함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겠다.
혼밥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로 꽉 차있는데, 추어탕과 솥밥이 나온다. 추어탕은 불에 올려 더 팔팔 끓여야 한다. 다진 청양고추와 수제비를 몇 알 넣어주며 끓어오르기를 기다리며 정갈한 밑반찬들과 미꾸라지튀김을 먹는다. 순무깍두기, 미역줄기무침, 시원한 동치미국물, 젓갈. 미꾸라지 튀김은 어쩜 이리도 고소한 지, 한참 맛에 빠져있을 때, 보글보글 소리에 눈을 돌린다. 한국자 크게 퍼내어 그릇에 덜고, 입천장이 데도록 뜨거운 국물을 한 숟가락 입에 크게 넣는다. 캬아... 맥주각인데 아쉽다.
찬바람이 불어 몸도 마음도 추운 날엔 더욱더 추어탕이 생각난다. 아이의 키 걱정은 온데간데없이, 이 뜨끈한 추어탕 한 그릇이면, 온 마음이 든든한 게 플라시보 효과처럼 기분이 업이 되곤 한다.
뜨끈한 국물과 밥을 퍼내고 난 후, 뜨거운 물을 부어 불려낸 누룽지도 엄마가 해주신 거 마냥 고소하고 달달한 게,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간다. 국물 한 방울과 밥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워낸 얼굴엔 땀방울이 송글 송글 맺혀있다.
끝내주게 맛있게 먹었나 보다.
누구에게나 소울푸드가 있다. 기분이 다운되거나, 유난히 쳐지는 날에 한 그릇 먹고 나면 기운이 펄펄은 아니더라도, 마음의 힘을 낼수 있도록 도와주는 음식말이다.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먼 타지로 남편 직장을 따라 이사 왔어야 했던, 아이들을 키우며 행복했던 만큼 힘들기도 했던 지난 날들 속에서 나를 잡아줬던 음식은 단연코 이 뜨끈뜨끈 추어탕이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추운 겨울을 앞두고,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날들이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가 않는, 우리 동네 추어탕.
그 자리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오래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