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안녕, 30대는 처음이지? - 12. 기억의 힘)
가끔,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다.
오늘 같은 날이 딱 그런 때다.
과거의 일을 후회하는 것을 싫어한다. 웬만하면 후회하려고 하지 않고, 그런 생각이 들 때 즈음이면 서둘러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쓴다. 내가 처한 현실이 불만족스럽진 않다. 그러나, 지극히 만족스럽지도 않다. 그래서인지, 나는 종종 꿈에서 과거의 나를 만나곤 한다.
꿈에서는 유치원에서 초등학생 즈음의 내가 주인공이다. 배경은 늘 우리 가족이 현 동네로 이사를 오기 전, 그곳이다. 생일날만 되면 엄마가 만들어주던 짜장떡볶이,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뛰놀고, 학교가 끝나면 오빠와 함께 사 먹는 붕어빵까지. 유난히 내 꿈엔 어릴 적 그 순간들이 많이 등장한다. 흑백인지 컬러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꿈속에서의 나는 즐겁다. 나는 그 동네가 좋다. 기억이 미화됐을 수도 있겠지만, 그곳을 정말 사랑했다. 가족들에게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옛 동네 이야기를 한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대답은 항상 똑같다. "네 어릴 적 기억 속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모양이야."
맞다. 아마, 그 당시에 나는 정말 행복했다. 멋모를 나이였지만, 행복했던 게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작년 즈음에, 그 동네를 다시 찾아갔다. 추억을 되찾기 위해.
오랜만에 찾아간 동네는 꽤 많이 변해있었다. 꿈에서 매번 곱씹어서인지 구 주소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억나는 지번이었다. 성내동 13X-1X. 도착해 보니, 외할머니와 함께 살던 주택이 재건축되어 빌라로 변해있었다.
씁쓸하기도 하고, 괜스레 슬퍼지는 것이었다. 집 근처에 있던 세탁소ㅡ세탁소 사장님 내외가 나를 퍽 이뻐해 주셨다.ㅡ와 문구점ㅡ그 당시에는 문방구라고 불렀다.ㅡ은 흔적도 없이 다른 가게로 바뀐 지 오래고, 남아 있는 건 근처의 재래시장뿐이었다. 동네를 쓱 둘러보니, 옛 생각이 절로 났다. 그리곤, 변해버린 건물을 바라보며 나는 울고 말았다.
온 가족이 설렜던 아빠의 첫 차, 엄마가 제일 이뻐 보였던 멜빵치마, 내가 늘 만지고 싶었던 오빠의 뚱뚱한 컴퓨터, 신발장에 걸려있던 거울까지,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눈물이 났던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도 왜 울었는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시절의 내가 그리운 건지, 그때의 우리 가족이 그리운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이 아쉽기도 하고, 이렇게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조금 서럽기도 했나 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성내동에 살던 어린 시절의 나는 정말 행복했다는 거다.
여태껏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이 시절을 외칠 것이다. 십 년이 지나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벌써 이십 년도 더 지났다. 그만큼 세월이 많이 지났고 동네도 많이 변했다. 우리 가족과 같이 한 건물에 지내시던 외할머니는 작년에 하늘나라로 가셨고, 부모님은 손주가 있는 엄연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되셨으며, 나와 투닥거리던 오빠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됐다. 나 또한, 뽑기를 좋아하던 꼬마에서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삼십 대 어른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시절의 기억이 참 좋다. 정말 소중하다.
또다시 이십 년이 지나도, 그 시절의 기억이 제일 행복한 순간으로 남아있을까? 훗날 정신없이 살다 보면 행복한 순간이, 잊지 못할 순간이 다른 기억으로 바뀔지 궁금하기도 하다.
나는 행복한 기억의 힘을 믿는다. 어린 날의 기억은 오늘을 살게 한다. 지금의 내가 힘들 때, 꿈속에 찾아와 "과거의 넌 정말 사랑받았어, 봐봐. 정말 행복했지? 지금도 사랑받아 마땅해. 너무 잘하고 있어, 지금 꼭 행복해야 해." 라며 응원해 주는 것 같다. 마치 오늘같이 말이다.
오늘도 나는 어린 날 기억의 소중함을 가슴속에 고이 간직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며, 또 다른 행복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