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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맛의 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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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근 May 12. 2022

내 마음 속 영원한 별, 멍게

  어린 시절 우리 할머니는 '새로운 음식'계의 오은영 선생님이셨다. 해삼을 처음 먹던 날이 생각난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때를 퉁퉁 불리고 있는데 할머니가 물크덩한 까만 덩어리를 손에 쥐고 욕실에 들어 오셨다. "영아, 할머니가 최고로 맛있는 거 가꼬 왔다. 아~ 해바라."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참말로 얄구져라. 이기 바다에 나는 산삼이라. 할머니가 맛있다 한 거 중에 맛 없는거 있더나? 두 개 무라 안 하낀께 딱 하나만 무 봐라" 못 이기는 척 입 안에 해삼을 넣고 꼭꼭 씹었다. "할머니! 이거 미끌미끌하고 느낌이 이상하다.", "미끌미끌한데 씹으모 또 오독오독하고 재밌제? 바다 맛이 느껴지나? 열번씩만 더 씹어 봐라. 입 안에 바다다 펼쳐진다." 할머니는 어찌나 나를 잘 구워 삶는 지 그런 식으로 먹게 된 음식이 한 둘이 아니다. 멍게도 그랬다. "저번에 해삼 생각나제? 징그럽다고 안 묵는다 해놓고 얼마나 맛있게 먹었노. 할머니가 멍게 장만하는거 함 볼래. 올록볼록한거 한 번 만져볼래? 색깔이 참 이쁘제? 빨간게 꼭 새색시 볼따구 같다. 이거를 이렇게 싹 써리모 물이 쪽! 나온다 아이가. 멍게의 맛있는 맛이 나가지 말라고 이리 껍데기가 있다. 영아, 한 번 아~ 해바라. 뿔따구 부분이 또 별미다.", "할머니, 이거 씁다.", "아이가 얄구져라. 쌉쏘리~ 한 그 맛으로 묵는기다. 얼마나 달다꼬" 할머니는 나를 향해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그 바람에 멍게의 맛이 알쏭달쏭하다고 느끼면서도 할머니가 말한 바다의 맛이 어떤 맛인지 궁금해 아직은 오묘한 미뢰를 곤두 세웠던 것 같다.


  할머니가 내게 건 마법은 시간이 지나서도 계속해서 효과가 나타났다. 도시로 고등학교 유학을 온 나는 시장에 지나가다가도 멍게가 보이면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이모. 제가 멍게가 진짜 먹고 싶은데요. 딱 두 개만 팔아 주시면 안 돼요? 진짜 진짜 너무 너무 좋아하는데요. 집에 혼자 있어서요. 많이 사가면 다 먹지를 못해요. 딱 맛만 볼 수 있게 도와주시면 안 돼요?" 교복을 입은 학생의 간절함과 불쌍한 표정이 통했는지 아주머니는 천원에 2개를 주겠다 하셨다. 무뚝뚝한 표정의 그녀는 검은 비닐 봉지를 들고 고개를 갸우뚱 하시더니 1개를 더 넣어 주셨다. 그 이후로는 시장을 지날 때 마다 "아이고 멍게 학생 아이가? 오늘은 멍게 안 먹고 싶나? 이모가 오늘도 많이 줄게" 하며 나를 기억해주셨다.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찾을 나이에 멍게를 간식 삼는 여고생이라며 말이다.

 

  취직을 하고 직접 돈을 벌게 되면서 선택할 수 있는 음식의 범위가 넓어졌다. 서울에서 가장 비싼 호텔에 가 스시 오마카세를 먹는가 하면,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규 코스 요리를 먹기도 했다. 어쩌다 횟집에 가면 주로 멍게를 서비스로 받았다. 그럴 때 마다 나는 멍게 보다 조금 더 비싼 해삼이나 개불을 서비스로 주면 안 되냐고 떼를 쓰곤 했다. 횟집 사장님과 말이 통하지 않는 날에는 입이 멍게의 뿔 만큼이나 튀어 나와 있었다. 한마디로 멍게는 내게 흔하고 하찮은 음식이 되어 버렸다. 어쩌다 시장을 걸을 때에도 더 이상 멍게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혼을 하며 자리 잡게 된 통영에서 멍게를 따는 일을 부업으로 하는 봉순을 만나게 되었다. "슨생님. 제가 따러 댕기는 멍게는 자연산은 아니고 다 토영바당에서 양식하는기그든예. 배 위에서 기계를 돌리가꼬 줄을 짝~ 잡아 땡기리면 벌~건 멍게가 졸졸졸 따라 올라 오는데 그기 얼마나 예삐다꼬예. 내랑 같이 멍게 따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 친구가 억수로 웃기그든예. 멍게 그기 물로 짝~짝~ 싸면 내 친구는 그 위에 올라 타 가꼬 궁디를 흔들어 쌋는데..." 봉순의 적나라하고 민망한 이야기에 얼굴이 멍게만큼 붉어 지는 날도 있었다. 하루는 투박하고 화려한 말 솜씨 만큼이나 맛깔나는 음식 솜씨를 가진 봉순이 점심을 준비해 오셨다. 휴게실 바닥에 신문지를 아무렇게나 깔고 그 위에 스테인리스 대접을 펼쳤다. 잘게 다진 멍게, 얇게 채 썬 상추, 다진 청양고추, 참기름, 간장양념, 조미 김가루가 담겨 있었다. "슨생님. 이게 보기엔 이래도 참 맛이 좋아예. 이것저것 한그슥 넣고 쓱쓱 비비가 잡사 보이소. 상도 없이 이리 차렸어도 같이 어불라 무면 그기 또 얼마나 맛있다고예." 급식소 식구들 여섯이 신문지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앉았다. 대접에 재료를 푸짐하게 넣고 슥슥 비벼 숟가락 가득 크게 떠 입에 넣었다. 통영 앞바다의 비릿함과 혀끝을 살짝 아리게 하는 쌉싸름한 맛. 멍게가 잘게 다져지면서 터진 내장의 녹진함이 따뜻하고 고슬고슬한 밥알을 만나며 만들어내는 보드라움. 참기름의 고소한 향과 멍게의 향긋함의 콜라보. 도무지 뭐라고 표현해야 그 맛을 적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흰자위가 다 보일만큼 눈을 동그랗게 떳다. "와.. 봉순!!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요? 밖에서 먹던 멍게비빔밥이랑 차원이 다른데요?", "맞지예. 식당에는 초장도 야채도 넣는데 그라면 몬 써예. 멍게 향이 다 죽어예. 그리고 토영엔 이런 말도 있어예. 씨어매가 매느리 집에 가서 멍게 먹고 딸 집에 가서 물 마시고 나서 딸집은 물도 맛있다 한다고. 씨어매 용심부리는 이야기가 아이고 그만큼 멍게가 달고 맛있다는 말이라예." 봉순의 이야기를 듣고 물을 마시니 과연 정말로 입안이 달고 상쾌했다. 멍게의 짭쪼롬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과 약간의 화한 매력이 통영에서 58년 세월을 보낸 봉순을 닮은 듯 하여 더욱 귀하게 느껴졌다.


  40년 넘게 통영음식을 기록하고 연구하고 계신 이상희 선생님께서는 저서 통영백미에서 멍게를 '매화가 만발할 때 바다에 피는 붉은 꽃'이라 묘사한다. 나는 멍게를 '내 마음 속 영원한 별'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학창시절 여드름이 많이 나거나 못생긴 친구들에게나 별명으로 붙여주던 멍게에게. 껍데기는 못생기고 투박하지만 부드럽고 향긋한 속살을 가진 멍게에게. 너는 맛도 있지만 너를 보고 있노라면 떠오르는 기억들이 내겐 너무 소중하다고. 그래서 너는 그 기억들과 함께 영원한 마음속의 붉은 별로 남을거라고.  






[멍게 손질하기]

1. 멍게의 붉은 꼭지 부분을 잘라낸다.

2. 잘라진 부분에 손가락을 넣어 멍게 속살과 껍질을 분리시킨다.

3. 멍게를 눌러 뻘을 빼낸 다음 적당한 크기로 썰어낸다.

tip. 멍게가 많이 나오기 시작하는 3-4월에 풋마늘과 함께 먹으면 알싸한 매콤한 맛이 어우러져 더욱 맛있다.



[멍게 파스타 만들기]

1. 마늘은 편썰고 아스파라거스는 한입 크기로 어슷썬다.

2. 멍게살을 반은 잘게 다지고 반은 식감이 느껴질 적당한 크기로 썬다.

3. 팬에 기름을 두르고 마늘을 볶아 향을 내다가 멍게, 아스파라거스 순서로 넣어 볶는다.

4. 삶은 파스타면과 면수를 3의 팬에 넣고 섞어준다.

5. 어간장, 참기름을 조금 둘러  맛을  낸다.

tip. 파스타면은 알단테가 되지 않도록 충분히 삶는다. 빠르게 조리해 먹어야 더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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