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시골 마을에서는 여자들을 부를 때 출신 마을의 이름을 따서 'OO띠'라고 불렀다. 'OO띠'의 어원은 OO댁인데, OO댁-OO띡-OO띠기-OO띠이-OO띠 이런식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르기 편하게 바뀐 것 같다. 그래서 고전면 출신이던 우리 할머니는 '고전띠', 화촌면 출신이던 뒷 집 할머니는 '화촌띠'라고 불렸다. 나는 부산 사상구에서 살다가 시집을 갔으니 '사상띠'라고 불려야 하나 싶기도 하다. 아무튼 40가구 남짓하던 작은 마을에서 내가 모르던 할머니들의 이름(실제 이름은 아니고 '00댁'과 같은 이름)은 없었다.
할머니는 지겹지도 않은지 5년 째 나에게 아기를 언제 가질거냐고 묻는다.
"아이고, 우리 나잉이가 빨리 아기를 가지야 할 긴데."
"내 애 안 낳을건데?"
"아이고, 우리 나잉이가 빨리 아기를 가지야 할 긴데."
"아, 쫌! 내가 알아서 한다."
"아이고, 우리 나잉이가 빨리 아기를 가지야 할 긴데."
"하... 나 참, 자꾸 그래싸서 안 생긴다 안 하요."
할머니는 미안하거나 분위기가 어색할 때 중요한 말을 피해 말을 돌리는 습관이 있다. 할머니 머리 속에는 이야기 풍선이 늘 가득 차 있어서 의식의 흐름에 따라 하나씩 톡- 하고 터뜨리고야 마는 것이다. 이번에 터진 이야기의 카테고리는 '마실띠'였다. "할머니, 근데 마실띠가 누고? 내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할머니는 옛날에 우리 동네에 살던 욕쟁이 할머니라고 했다. 그냥 할머니가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 하나 있었다고.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할머니는 친정식구의 입을 줄이기 위해 우리 마을로 시집을 왔다. 시집살이가 어찌나 힘든지 고추보다 더 매웠다고 하는데, 그 보다 힘든게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였다. 할머니가 시집 오고 얼마되지 않아 할아버지는 군대를 가야했다. 게다가 한국전쟁까지 터지는 바람에 7년이 넘는 군 생활을 했다. 아주 가끔 휴가를 받아 집에 왔는데, 그때마다 시할머니가 오래 그리던 아들과 같은 방을 썼다고 한다. 그런 할머니에게 자식이 생길리 있었을까?
할머니는 시집 온 후 오랜 세월 자식도 남편도 없이 홀로 시어머니를 모셨다. 동네사람들은 할머니를 입에 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특히 마실띠라는 사람이 동청거리 밑 개울가에서 할머니에게 했던 말이 안 잊혀지는 것 같았다. "저 년은 씹구녕이 썩었나. 안죽까지 얼라도 하나 못 낳고 머하노" 할머니는 서러움에 눈물이 났지만 못 들은 척 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자식을 5명이나 낳았다고 으쓱했다.
'뭐 나중에는 아기가 생길거니까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는 건가? 남들이 하는 말은 그냥 흘려 들으라는 건가? 그럼 할머니도 잔소리 하지 말지...' 입속으로 맴도는 말을 삼켰다. 이건 할머니식의 위로라는 것을 잘 아니까. 그리고 할머니는 만원짜리가 양껏 들어있는 하얀 봉투를 내게 줬다. "우리 나잉이 아기 만드는데 써어" 할머니가 분명 여러 번 세었고 백 장 들었을거라고 했던 지폐가 집에 돌아와 세어보니 98장인게 갸우뚱하긴 했지만. 할머니다워서 웃음이 났다.
<에필로그>
할머니 집에 다녀오는 길에 이모의 전화를 받았다.
"이모야, 근데 마실띠라고 아나?"
"응, 알지. 니가 마실띠를 우찌 아노?"
"할머니한테 말을 아주 나쁘게 했더라고. 내도 기분이 나빠서."
"그 할매 원래 그런다. 우리 할머니 완전 욕쟁이였다. 기가 너무 쎄서 아무도 못 이기는 그런 할매 있다이가."
"잠시만, 뭐라고? 우리 할머니? 무슨 소리고 할머니는 욕 한마디도 안 하는데"
"아니, 너거 할머니 말고 우리 할머니! 할머니 시엄마!"
마실댁이 오래전에 돌아가시고 안계신 할머니의 시어머니였다니.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반 익명으로 할머니 시어머니의 욕을 듣다니. 그것도 참 할머니다워서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