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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근 Mar 09. 2024

아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 엄마편

  굳이 떠올리지 않던 옛날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남편의 파견근무로 독박육아가 시작되고부터였다. 70일 즈음의 아이를 돌보느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제대로 자지 못했다. 호르몬의 변화와 체력부족으로 항상 날이 서 있었고 남편에게 언성을 높이는 날이 많아졌다. 싸움이 커지는 날에는 홧김에 이혼하고 아이를 혼자 키우는 상상도 했다. (MBTI가 N이고 상상을 자주 합니다. 현재 남편과는 여러모로 잘 지내는 편입니다.) 내가 가진 돈으로는 전세는 못 구하겠네. 복직해서 출근을 하면 아기를 봐줄 곳이 어린이집 밖에 없네. 이렇게 어린아이를 받아주는 어린이집 찾기 어렵겠다. 삼백이 채 안 되는 월급으론 월세, 분유값, 기저귀값, 식비 등등 충당하면 아무리 아껴 써도 전세자금 모으기가 쉽진 않겠네. 혼자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도 힘들 텐데 일자리까지 불안정하면 얼마나 힘들까. 그러다 나는 한 사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나의 엄마.


  엄마는 아빠의 외도로 결혼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세 살도 되기 전의 일이라 나는 기억이 없다. 엄마는 나와 함께 하는 삶을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우선 할머니가 계신 곳 근처로 이사를 했다. 할머니는 맞벌이 중인 큰삼촌을 위해 손주를 돌보고 계셨는데 거기에 내가 보태졌다. 엄마는 근처 가방공장에 취직해 하루 10시간 넘게 재봉을 했고, 쉬는 날에는 엄지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밤을 깎았다. 내가 유치원에 입학할 때쯤 큰삼촌이 유학길에 올랐다. 손주를 돌보며 시작한 타향살이에 울적함이 생겼던 할머니도 시골로 다시 돌아가셨다.


  돌봄을 의지할 곳이 없어진 엄마는 없는 형편을 탈탈 털어 작은 방이 딸린 가게를 얻었다. 엄마가 경제활동을 하는 동안 내가 있을 곳이 마땅찮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머지않아 가게는 망했고, 엄마는 밤늦게 아는 언니네 가게에 과일을 깎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낮에도 무슨 일을 하긴 했는데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엄마는 700명이 넘는 학생 중에서도 전교 2등을 할 만큼 공부도 잘했다던데 왜 마땅한 직업을 가지지 못했을까. 결혼하기 전엔 학교에서 주산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던데 결혼을 하며 거주지가 바뀐 모양이다. 둘째, 여성, 결혼 등과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며 그저 짐작할 뿐이다. 


  초등학생이 된 나는 4교시가 끝나면 하교를 했다. 피아노, 바이올린, 미술과 같은 학원들을 전전하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항상 집에 안 계셨고 주인집 아주머니가 저녁을 챙겨주셨다. 엄마는 밤 아홉 시 반이 넘어 영어학습지 선생님의 수업이 끝날 때쯤에서야 겨우 집 앞에 도착했다. 가게에 손님이 많은 날에는 주인집 아주머니를 통해 엄마가 늦는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나는 빈방 침대에 엎드려 누워 다리를 통통 구르며 기약 없는 엄마를 기다리곤 했다.


  2학년 2학기에는 같은 도시의 다른 동네에 위치한 학교로 전학을 갔다. 6학년 쌍둥이 오빠들을 혼자 키우며 미용실을 하던 엄마친구(쌍용이 이모)네에서 지내게 된 것이다. 다른 것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오빠들이 다니던 검도학원에 따라가던 기억은 생생하다. 쌍용이 이모가 미용실을 비우고 어딘가 급하게 가야 할 때면 궁여지책으로 나를 오빠들에게 맡기곤 했다. 오빠들은 목검을 내 손에 쥐어 주며 심심하면 자기들을 따라 해 보라 하기도 했다. 직접 라면을 끓여주는 날도 있었다. 돌봄의 대상에게 돌봄이 전가된 것이다. 그런 이유였을까. 쌍용이 오빠들과의 동거생활이 길게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


  결국 나는 그해 겨울방학 때 할머니집으로 보내졌다. 엄마는 일 년만 지나면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일 년이 지나서는 또 일 년만 더. 그리고 또 일 년만 더. 그러다 보니 중학생 교복을 입고도 여전히 할머니집에서 지냈다. 나는 이곳에 맡겨진 걸까 버려진 걸까. 숱한 물음표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날이 많았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체육대회에 오지 못하는 엄마를 원망하며 끼니를 거른 채 울던 날도 있었고, 엄마의 흔적을 찾기 위해 오랜만에 할머니집에 온엄마가 입었던 옷의 냄새를 맡으며 잠들던 날도 있었다. 가끔 엄마집에 다녀온 날에는 그곳의 초라함이나 엄마의 통장잔고 사정 따윈 잊고 혼자 잘 지내는 것 같아 묘한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엄마는 시한부 판정을 받고 나서야 다시 함께 살자던 약속을 지켰다. 엄마는 병원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본인보다 커 보이는 쟁반을 머리에 이고 식사 배달을 다녀야 했다. 주먹보다 커져 육안으로도 보이는 암덩어리를 뱃속에 품고서. 아빠는 땅도 사고 새집도 지어 잘 산다던데. 왜 돌봄을 맡는 사람은 더욱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걸까. 왜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 직면하는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것일까. 아이를 낳고 마주한 육아 현실 앞에 어른들의 입으로 설명되지 못했던 말들을 상상해 본다. 가진 거라곤 월세 보증금 밖에 없어서 분리된 방도 없이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돌아서면 엄마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서 그저 좋았던 그날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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