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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인 Jun 27. 2021

아버지는 사업을 위해 축구화를 신으셨다.

가장이란 책임감


예전의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아빠라고만 불러왔지,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보통의 근엄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와는 다르게 우리 아빠는 젊은 세대들과 잘 통할만큼 편하게 대해주셨던 인물이셨다.

그러한 아버지는 소위 조기축구라고 하는 모임을 그저 취미로만 즐겨하셨었다.

운전 학원의 운전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으로 근무를 하시며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조기 축구 모임을 하셨다.

이때만 해도 우리 가족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생계를 걱정할 일도 없었고 아버지에게 들어오는 월급과 인센티브로 내가 21살이 되기까지 우리 가족은

먹고살만했다.


하지만 일은 내가 22살이 되면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이런 걸 "일이 터졌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충주에서 태어났지만 서울에서 몇십 년 동안 직장일을 하시며 또 다른 취미로 밴드의 드럼을 하셨던 아버지는 자신의 문화생활을 모두 포기하고 부모님을 선택하여 충주로

내려오셨다.

나는 그 당시 부모님과 같이 내려오지 않았고 직장 생활을 하며 다세대 주택 반지하 월세방에 자취를 하며

살았다. 사실 나는 그 당시 충주로 내려와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몇 안 되는 친구들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만나야 하는 친구들과 직장에서 만났던

동료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지역으로 가서 그 지역에서 다시 시작을 한다는 타향살이가 결코 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당시 병원에서 근무를 하며 나는 아빠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바로 당구장을 계약을 했다는 전화였다.

당구장? 당구장을 계약했다는 말에 한참 동안 생각을 많이 했었다.

서울에 밴드 생활을 하며 아빠 모임에 키보드를 치며 따라다녔던 나는 당구장 역시 몇 번 가봤었다. 그때의

당구장은 사람들이 많았었고 잘만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런 당구장을 전세 계약을 했다는 말을 듣자 아빠도 이제 직원이 아닌 사장님이구나. 그러면 나는

당구장 딸내미이네?라고 생각했고 사실 그 전화를 뒤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몇 달간의 자취를 한 후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하고 충주로 오게 된 나는 아빠의 당구장의 실세를

보게 되었는데 정말 상상과는 달랐다.

하루의 매출이 5만 원을 넘는 일도 없었고 손님이 바글바글 한 일도 거의 없었다.

매출이 나오는 컴퓨터 역시 인터넷을 할 수 없어서 기본 당구장 프로그램만 볼 수 있었고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탓에 아버지는 당구장에 연탄까지 들이셨다.


연탄의 불을 계속 바꿔도 한겨울의 추위는 없어지지 않았다. 화장실에만 가도 옛날 건물이다 보니 추위가

유리창을 뚫고 들어왔었으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겉으로만 쾌적해 보이는 환경이었다.

그러한 환경에 우리 아빠는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고자 새벽 2시에서 3시까지 일을 하시며 오지 않을 손님들을

하염없이 기다리셨다.


지금은 이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지만 소위 말하는 월급쟁이에서 사업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달에 기본으로 200은 넘게 벌었던 양반이 한 달에 100만 원도 벌기 힘들다면 어느 누가 그 일을 참고 감당할 수 있을까? 그 자리가 가장의 자리에 위치해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매출이 너무도 나오지 않다 보니 아빠는 인맥이라도 만들어보고자 지역 조기 축구 모임에 들어가셨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뭔가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 모임은 개인주의가 강한 성향도 있고 조직원 중 그가 하는 가계를 밀어주는 그런 일도 없는 곳이었다.

처음으로 아빠가 그 모임에 참석했을 때 축구경기가 끝나고 식사를 하러 가는 자리였는데 신입으로 들어온 사람을 어느 누구 하나 챙기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이것을 말로만 전해 들었지만 직접 겪으셨을 아빠의 심정이라면

아마도 새로운 시도는 절망으로 다가왔을 것이었다. 아빠는 그 모임에 가시게 되었다고 말씀하실 때 한동안

신지 않으셨던 축구화를 꺼내며 설레어하셨었다.


그 뒤로 아빠는 그 모임을 포기하시고 산속에서 귀한 버섯이나 열매를 따는 일을 하셨는데 나는 처음 그 일을 하신다고 들었을 때 정말 무척이나 싫었다.

티브이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을 보면 그런 일은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데 담배연기가 자욱한 당구장 일도 부족해서 그런 위험한 일을 하신다고 하는 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아빠에게 짜증과 화를 냈었다.

"왜 도대체 그런 일을 가냐고. 안 가면 안 되냐고"


그렇게 화를 냈었고 몇 년 동안은 그 일을 아무렇지 않게 잊고 지냈다. 아빠는 당구장 가게 일을 처분하셨고

지금은 다시 운전학원에서 근무를 하신다. 그 사이에 나는 결혼을 하게 되어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었는데

아이를 키우다 보니 그때는 몰랐던 아빠의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돼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얼마나 생활이 힘들고 가장의 책임이 무거웠으면 그런 일까지 하려고 했을까, 그런데 딸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이해를 못하고 짜증을 냈으니'


아빠의 철없던 딸이었을 때는 몰랐지만 한 가정을 이루게 되고 엄마가 되다 보니 내 아이를 그리고 이 세상을 부모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만약 우리 가족이 힘들어진다면 나는 뭐라도 하겠어, 생계를 꾸려야 할 가장이 된다면 절대 가리지 않고 무슨 일이든 다 할 거야


이런 식으로 마음이 변해버린 것이다. 아마도 아빠 역시 이런 마음이시지 않으셨을까?

만약 아직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런 마음 역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왜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우둔하게도 쉽게 말하고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인지. 그 일을 하는 그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철저하게 오해와 섣부른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인지.


또한, 부모가 되면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된다고 했던 예전 어른들의 말은 정통적으로 일리가 있으며 맞는 말이다.

우리 가족을 위해 위험도 무릅쓰고 일하셨던 우리 아빠. 그리고 철없이 말했던 그날의 나도 다시 한번 맞이 하게 된다면 그 짜증과 화를 억누르고 그저 아빠를 따스하게 안아드리고 싶다.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냐고. 그리고 가장의 책임감은 이제 다 큰 딸과 함께 나누셔도 된다고, 이 말을

그때로 돌아가게 된다면 전해드리고 싶다'


그리고는 말 한마디를 해도 웃음 짓게 하며 사랑스러운 말을 하는 그런 딸로 남아드리고 싶다.

사업을 위해 축구화를 신으셨던 우리 아빠를 위해 나 또한 살가운 딸이 되어드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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