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풋'과 '아웃풋'이라는 용어가 내 머리에 꽉 차 있던 새벽 밤, 사자 한 마리가 포효하듯 집 밖에서는 천둥과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왜 나는 이 용어에 꽂혔던 것일까. 정확하게 말한다면 내가 그 용어를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용어가 나를 부른 것일까. 무슨 일을 실행하기에 앞서, 이를테면 사업 계획서를 써야 할 시점이라면. '왜'라는 것에 간구함이, 신을 부르짖을 정도로 절박해졌다.
그물망처럼 짜여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얽어내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역에서 얻은 단 한 줄의 문장도 쓰지 못하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기대하고, 왜 하는지에 대한 필요성을 허언하는 짓거리를 매년 반복하고 있음을 고백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사업계획이라는 것이 거창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소설을 쓰기 위한 개요를 짜는 것, 교육을 하기 위한 수업계획서를 짜고 시뮬레이션해 보는 것, 마을 공동체 어르신들의 삶의 이력을 담은 내러티브를 담을 소책자를 제작하는 것, 진짜 내가 지역에서 해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찾는 것, 오늘 당장 해야 할 일에 대한 생각, 타인과의 관계에 얽매여 둘둘 말려버린 내 편견의 주름을 펴고 좀 더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은 갈망에 손대고 싶은 것 등등을 일컫는다.
대단히 공적인 것 같으면서도 그 층위의 결에는 사적인 '나'를 중심에 두고 사고 할 수밖에 없는 주관성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 나에게 있어 '사업계획서 쓰기'였다. 늘 얼치기 쓰기로 끝나고, 적나라한 구체성이 보이지 않는 단어의 틈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라며 미친 소리를 해야 하는 경우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다고, 정의 구현이니, 공정과 상식의 사회이니, 지속가능성이니, 만방의 세계 평화니, 일상의 민주주의니 같은 손에 잡히지도 않는 말에 내 정신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새벽의 날씨를 보며, 오늘은 황토가 많은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은 농사일하지 않겠다는 상념이, 그분들이 술외에 재밌게 놀 수 있는 문화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지대에 살며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언젠가 장판을 걷고 벽지를 뜯는데 손을 보탠 노부부의 집에서 맞닥뜨렸던 옷, 이불, 매트릭스, 가재도구를 포함한 풍경이, 술만 마시면 밤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아침이면 순한 양이 되어 마을 어른들에게 한 소리를 듣는 마을의 아픈 손가락 아무개 아저씨,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해 새벽 운동을 하는 손가락을 잃어버린 아무개 씨, 동네 아이가 이 빠진 표정으로 활짝 웃는데, 그의 얼굴에 배추 머리로 콜라보를 이루며 당신의 주가를 한창 올리면서 벽화 작업을 하던 아무개 씨의 굽은 어깨, 면사무소가 허물어질 때 고별전을 하던 날 행사 무대에서 난타 공연을 하던 어머니를 보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 딸 내외의 표정이, 대화모임에서 그림책으로 세상과 연대하기를 꿈꾼다는 테라피스트, 젊은 사람들을 위해서 이제는 자리 비움을 생각해 본다는 환갑이 넘은 마을 어른, 반면에 읍면에 인구소멸 대응 기금과 연계해 앵커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민단체 활동가, 인생이라는 로드맵에서 선택의 문제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1인 가구의 삶과 돌봄의 문제를 알려준 주민, 일평생 지역을 떠나지 않았으며, 농사지으며 지역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는 청년, 삶의 여유를 생각하며 귀촌한 이래, 어느 순간 작은 학교 살리기에 앞장설 수밖에 없었던 학부모가 둘레길에 심어진 꽃이었다.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해 피었다. 열매가 있는 자리에 꽃은 없다. 고로 꽃은 '왜'에 다른 형상이다. 꽃을 함부로 꺾지 말라는 말은 아웃풋인 열매가 그 안에서 견실하게 맺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그 소망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 이 순간이 썩 괴롭지는 않다. 단단하게 줄기에 맺힌 열매는 어떤 맛이 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