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친구가 다친 사진을 봤다. 사진은 아내가 카톡으로 보냈다. 퇴근을 앞둔 여섯 시 무렵, 숨이 가쁘게 올라온 사진을 멍하니 봤다. 왼쪽 눈썹 가까이 깊게 팬 상처는 눈 가장자리를 다행히 비켜 있었다. 아내가 연달아 올린 문자 메시지를 보고, 아이가 넘어지면서 문 모서리에 얼굴이 부딫치면서 상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둔탁하게 올라오며 찌릿해지는 아픔이 눈에 흡수되는 듯 해, 질끈 눈꺼풀을 닫았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볼을 찡그렸다.
아이는 아들의 친구이기도 했지만, 우리 부부와도 가까운 지인의 자녀이기도 했다. 병원을 알아본다는 말에 나는 지역의 종합병원에서 치료할 수 있는 과를 찾고 있는 정도로 이해했다. 하지만 내 이해는 빗나갔다. 지역에서, 성형외과 의사가 없어 찢긴 상처를 봉합해 줄 수 없어, 인근의 타 도시를 물색하고 있다는 메시지도 받았다. 겨우 여섯살 남자아이가 간단한 응급처치만 받고, 타 도시로 가기 위해 차에 올라탄 모습이 상상됐다. 아프다고 발을 동동 굴리는 아이의 모습, 이 상황에 침착함을 유지하고자 하지만 마음이 성급해지는 부모의 모습이 교차로 그려졌다.
실제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었든 간에, 그 순간이 부모에게는 더디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나마 치료할 수 있는 타 도시의 병원을 찾았다는 것, 2시간 남짓 차를 타고 갈 수 있다는 것에 '흡족', '안심'이라는 용어를 빌려 쓰기에 망설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부부가 첫 아이를 가졌을 때였다. 아내는 결석으로 고생했다. 지역의 산부인과에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이모부가 오랜 교직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밭을 경작하고, 시골에서의 소일을 꿈꾸셨다. 그러나 그 꿈은 그리 길게 꾸지 못했다. 뇌졸중으로 몇번의 쓰러짐이 있었다. 위급 사항이 있었고, 지역에 머무는 것보다는 병원과 가까운 도시 근교에서 생활하시는 것이 더 낫다는 이모와 사촌 형제들의 판단하에 이모부는 다시 고향을 등졌다. 지역살이 한 생의 주기가 이들 덕분에 밀착된 느낌이었다.
끊임없이 변하는 생의 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태어나서 성장하고, 결국 나이가 듦에 대한 고찰 끝에 얻는 결론이란, '돌봄과 질병'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일수 밖에없다. 지역 공공의료 체계의 취약성에 관한 해법은 개인이 풀 수 있는 문제는 더욱더 아니었다. 아들 친구가 다친 사건, 우리 가족의 경험을 통해 생생히 전달되는 것뿐이었다.
아이들이 다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고, 당연하다. 하지만 카톡으로 본 그날의 사진을 보며, 나는 귓전을 따갑게 울리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먼저 들렸다. 눈 가장자리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것을 보고 천운이라며 안심했어야 했을까. 조금만 상처가 깊어 눈을 다쳤다면 그때는 응급처치만 지역 병원에서 받고 인근의 광역시로 혹은 타 도시로 병원을 알아보고, 출발하고, 다시 상처 경과를 검사하는 그 과정을 온전히 견딜 수 있을까. 불안은 차가운 병원 바닥에서 돋을 새김 하듯 가슴에 닿았다.
아픈 아이를 차에 앉고 올라타는 순간, 돌덩이 같은, 부모의 마음을 매달아본 사람이라면 이 말을 이해해 줄까. 시일이 지나면 아들 친구의 상처는 아물겠지만,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는 염려는 지역에서 아이를 키우는 모든 부모의 마음을 졸일 것이다. 결국 세심함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지역사회 의료 지원을 어느 범위까지 설정할 것인가. 이것은 부처 간의 담을 허무는 것에서부터, 지역 간의 느슨한 관계 맺기를 통해 이루어야 할 과제임이 분명했다.
결석으로 인한 고통을 겪어본 경험이 있어 그 고통을 가늠한다. 칼날 하나가 몸 안에 박혀 있는 듯하고, 통증이 찾아올 때마다 몸은 경직되고, 등허리를 누군가 빨래 쥐어짜듯 하는 느낌말이다. 임산부가 아니라면 지역에서도 결석 정도는 치유할 수 있지만, 산모의 처지가 되면 말이 달라진다. 농사일을 쉬어야 하는 비 오는 날, 장마철, 오일장이 서는 날, 명절 대목이 지나간 날, 지역의 병원에는 각각의 이유로 찾아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종합병원으로 쏠림 현상은 서울 등의 근교에 있는 큰 병원으로 쏠리는 것과 견주었을 때 그 규모만 다를 뿐 대동소이했다. 그것이 지역 규모나, 전국 규모냐는 차이만 존재할 뿐이었다.
의료 인프라 확충 문제, 전문 인력 양성 및 적재적소에 배치 문제,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문제, 지역 혹은 마을에 머물며 노년을 설계할 수 있는 답을 찾고 싶다는 말인즉, 인간의 생애 주기에 따라 건강한 삶의 질을 영위하기 위한 권리를 재창하는 말이기도 하다. 내 부모가 고향을 떠나지 않도록, 내 나이 듦이 떳떳해질 수 있도록, 내 아이가 온전히 성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것은 너, 나, 우리의 삶의 길이기도 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