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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안 Apr 11. 2024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패스트 라이브즈

*스포일러 주의! 영화 관람 후에 읽으시기를 추천드립니다*


    해질녘, 열린 차창으로 불어오는 미지근한 바람.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애틋한 추억처럼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 보랏빛 하늘. 두둥실 반짝이며 회전하는 목마들은 돌아오지 않을 어린 날의 순정을 업고 달린다.

서사가 다루는 감정을 완벽하게 시각화하는 장면들. 데뷔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셀린 송의 완숙한 재능.

    멜로의 탈을 썼지만, <패스트 라이브즈>를 단순한 멜로 영화라 여기면 곤란하다. '노라(by 그레타 리)'와 '해성(by 유태오)' 사이의 감정이 로맨스로 한정되는 순간 이건 짜치는 불륜 미수 영화가 될 뿐이다. 이게 로맨스 영화였다면, 카메라는 집요하게 노라와 해성만을 프레임에 담았을 거다. 세상 모든 게 멀어지고, 영화라는 세계는 오롯이 두 사람의 소유가 되었겠지. 그러나 극히 일부의 장면을 제외하고, 카메라는 주변을 흐리려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심지어 노라와 해성은 많은 씬에서 프레임의 중앙에 위치하지도 않는다. 영화의 시선은 내내 주변부의 인물에게 금세 식고 말 가벼운 흥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연히 마주친 두 행인의 흥미로운 이야기에 몰래 귀를 기울이다가도 지나치면 금방 잊어버리고 말듯이.

노라와 해성은 다리 아래의 다른 많은 커플들과 구분되는, '주인공'의 지위를 갖지 않는다. 그저 풍경의 일부가 될 뿐.

    영화의 중심을 관통하는 인연이라는 단어의 쓰임이 흥미로운데, 노라에게 남편 '아서(by 존 마가로)'는 과거의 생들이 맺어준 인연이 아닌 현재의 주체적인 선택이고, 해성은 이제는 함께할 수 없는 지나가버린 인연이다. 인연이라는 말 자체가 'past lives', 즉 전생, 혹은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과거의 미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노라와 해성, 혹은 노라와 아서가 아닌, 노라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에서 주인공이듯이. 선택을 내리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삶을 일구어 나가는 평범한 한 여자의 삶. 셀린 송이 보여주고자 했던 건 애절한 로맨스도 극적인 성공 신화도 아니다. 길가에 채이는 돌멩이처럼 흔하디 흔한 개인의 인생. 셀린 송은 사소한 시선으로 사소한 누군가의 현재를 보고자 한 것이다.

첫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장면이 영화 전체의 시선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바에서 알 수 없는 관계의 세 남녀를 발견하고 잠깐의 흥미로 수군거리는 '우리'의 시선.

    그러므로 마지막에 노라가 아서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단순히 해성에 대한 미련으로 설명하는 것은 편협한 해석이다. 그 순간 노라에게 해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건, 해성이라는 존재가 뉴욕으로 몰고 들어온 서울의 기억들,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다.

    번복할 수 없는 선택들이 모여 현재의 '나'를 이룬다. 그럼에도 우리는 곱씹을 수밖에 없다. '만약에'라는 질문을. 가질 수 있었으나, 가지지 못한 생들. 이번 생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들, 그리고 '패스트 라이브즈'에 대한 미련. 그러나 노라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씩씩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갈 것이다. 삶은 얻는 만큼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만큼 얻는 것이므로.

안녕, 어린 시절의 나. 갈림길은 두 사람의 인생을 영원히 바꿔놓는다.

    앞서 평범한 한 여자의 삶이라고 했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노라는 평범한 이민자로서의 삶과 감정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제는 영어가 훨씬 익숙한 노라지만, 여전히 잠꼬대만큼은 한국어로 한다. 노라와 아서, 노라와 해성 사이에는 서로가 결코 방문할 수 없는 문화적/정서적 사각지대가 존재하고, 그 간극은 언어로 대표된다. 완전한 한국인인 해성, 완전한 미국인인 아서와 달리 노라는 늘 경계를 오가는 인물이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국은 실제와는 달리, 촌스럽고 투박했던 90년대에 머물러 있다. 누군가는 그 묘사를 보고 사대주의적인 것이 아니냐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상기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바로 노라의, 셀린 송의, 이민자의 뿌리는 지금은 사라져 버린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딜 봐서 평범한 얼굴입니까 이게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은 다름 아닌 캐스팅이다.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된 노라야 그렇다 치고, 토종 한국인이라는 설정의 해성 역을 맡은 유태오 배우의 한국어는 도무지 유창하다고는 할 수 없어서, 지속적으로 몰입을 깬다. 감독이 이민자이고, 영화가 세계 시장을 타깃으로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크게 문제 될 건 없는 캐스팅이겠지만, 한국어 원어민들에게는 아무래도 어색해 보이는 것이 사실. 말이 어눌하게 들려서인지는 몰라도 연기마저 아리송하게 느껴진다. 노라 역의 그레타 리 배우가 너무나 훌륭한 연기를 보여줘서 더더욱 아쉬운 부분.

    그와 더불어 지나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의문은, '해성이 미남일 필요가 있었는가?'이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첫사랑은 평범한 어른으로 자라날 확률이 크다. 해성의 설정값 자체가 '평범한 한국 남자' 아니던가. 감독의 사심이 섞인 건지, 불필요하게 미형인 해성의 얼굴은 영화의 멜로드라마적 요소를 지나치게 부각한다. 차라리 해성의 친구 역을 맡은 장기하 배우가 해성을 연기했다면 더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실제로 해성 역으로 오디션을 보셨다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이 영화가 마음에 든다. 대사, 화면, 소리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조화롭게 힘을 합치고 있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미적지근하고 애틋한 저녁의 분위기. 노라의 흐르는 듯 편안하고 우아한 복장. 영화는 평범한 것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유려하게 증명해 낸다. 우리 모두의 삶처럼.


단 한 마디 '노스탤지어'라는 단어가 영화가 된다면.


* 선택과 미련, '만약에'라는 질문에 대한 보다 극적이고 화려한 블록버스터가 보고 싶다면 :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양자경의 멀티버스

* 다안의 영화 이야기가 더 듣고 싶다면 : 다안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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