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의존성(經路依存性, path dependence):한 번 일정한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그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성(위키백과)
‘억울하면 출세해라!’ 어린 시절 어른들 사이에서 항상 듣는 말이었습니다. 돌아보면 그것은 불합리한 사회에서 억울함을 상쇄하는 길은 권력을 잡는 수밖에 없다는 자조적인 이야기지만, 저희 부모님은 자식들 교육을 위해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방에서 그리 잘 살지 못했던 가정 형편이었지만, 운 좋게 지방국립대를 졸업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어려운 형편에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한 자식을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같은 직장에서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아 15년째 지내고 있습니다. 부모님으로서는 그나마 지방에서 좋은 대학 나와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시켰으니 역시 공부시키길 잘했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저 또한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저희 부모님은 손녀 둘을 향해 공부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을 바꾸는 길이라 말씀하십니다.
안정적인 정규직, 저희 부모님 때에는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IMF와 함께 대학 생활을 시작한 우리 세대에게는 점점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고 이제 우리의 자녀 세대에서의 정규직은 딴 세상 이야기로 보입니다. 소위 말하는 대기업 정규직에 대한 선망이 점점 더 커지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저 또한 대기업 공채만이 답이라 생각해왔습니다. 제가 자라고 취업하는 과정에서 본 유일한 형태였기 때문입니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건동홍숙 국숭세단을 되뇌며, 소위 말하는 좋은(?) 대학에 가려 하는 이유도, 각종 스펙을 채우는 이유도 그 끝에는 대기업 공채가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부모가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사교육과 선행학습에 매달리는 이유도 바로 대기업 공채를 통과하기 위해서입니다.
뉴스에서 공채가 사라지고, 수시채용이 늘어난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블라인드 채용이 증가한다는 뉴스를 보아도 잘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피부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부모인 제가 경험해 본적인 없는 채용이었기에 더더욱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습니다. 저의 부모님 세대 그리고 제 세대까지 증명되고 이어져 온 그동안의 경험들이 경로의존성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던 중 오늘 교육의봄에서 저의 눈을 이끄는 책이 나왔습니다. 《채용이 바뀐다 교육이 바뀐다》 제목부터 도발적인 이 책을 보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받은 뒤 표지 아래에 적인 ‘SKY캐슬은 무너지고 있다’라는 말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채용이 바뀐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교육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교육의 봄 외 17인 《채용이 바뀐다 교육이 바뀐다》 우리학교
‘그 결과는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채용에서의 변화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전면적으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채용에서 출신학교 스펙이 당락 결정에 필수인 시대는 지났음을 확인했습니다. … 채용 현실을 알고 이를 바꾸는 운동을 하기로 했는데 이미 변화가 큰 폭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알리기로 했습니다.' p10
새로운 룰은 이미 시작되다
이 책은 크게 5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왜 채용이 바뀌고 교육이 바뀌어야 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바로 IT기업, 외국계 기업, 공기업, 금융권, 대기업의 채용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5개 기업군에 대한 내용이 각각의 장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어서 좋았습니다. 그래서 순서에 따라 읽지 않고 관심 가는 기업군부터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학문적인 내용이 아니라 실제 기업의 담당자가 나와서 자신들의 기업에서 하는 채용방식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어서 읽기에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고정관념 하나가 깨졌고, 오해 하나가 풀렸습니다. 깨진 고정관념 하나는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공채가 사실은 굉장히 특별하고 예외적인 채용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필요한 인원을 부서별로 원하는 사람들을 결원이 생길 때마다 뽑는 것이 자연스럽고 세계적으로도 일반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풀린 오해 하나는 블라인드 채용방식은 학벌을 타파해야 한다는 정부나 사회 여론을 의식해서 당위적 차원으로 시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업 스스로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시행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근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직접 읽어보시면 그 의문이 해소되리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경로를 설정할 때
'그렇게 자신을 부정하며 오직 부모님의 기준에 맞추어 출신학교 스펙과 성적관리를 해 왔는데, 이제는 기업에서 ’네가 누구인지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억울합니다. 아이들의 잘못은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직업 세계로 진출하려 하니 내 존재가 부정당합니다.' p371~372
도착지가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도착지에 도달하는 방법도 달라졌습니다. 비행기를 조종해서 바다를 건너야 하는데, 아이들은 기찻길을 만들고 그 위에 기차를 운전해서 바다로 가고 있는 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전에도 아이들을 이렇게 키우는 것이 옳은가 의문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길 다른 대안을 보지도 못하였고 상상할 수도 없었기에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뉴스에서 채용 시장이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피상적이었기에 제 마음속에서는 ’바뀌어 봤다 얼마나 달라지겠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채용이 달라지고 있음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것도 실제 담당자들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도착하는 방법이 달라졌으니 우리 자녀들을 어떤 방향으로 도와주어야 할지 좀 더 명확해졌습니다. 어느 때보다 예측하기 어려운 시절 학부모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준비시켜야 할지 도울 수 있는 좋은 렌즈가 되리라 생각합니다.